[르포] “사랑합니다. 전쟁 없는 세상서 다시 만나요” 길원옥 할머니 마지막길 [세상&]
위안부 피해자 故 길원옥 할머니 별세
이용수 할머니도 빈소 찾아 유가족 위로
“존경합니다”…시민·정치권 조문 행렬
[헤럴드경제=안효정 기자] “수요집회 때마다 항상 밝게 웃어주시고 손도 잡아주셨어요. 가시는 길 이렇게라도 뵙는 게 도리인 것 같아 왔습니다.” (수요집회 참여자 이모씨)
17일 오전 10시께 인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 이곳엔 향년 97세로 전날 별세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의 빈소가 마련됐다.
길 할머니 유가족들은 엄숙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조문객들을 맞으며 고인을 추모했다.
유가족 측은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서 직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저희 어머니는 정말 훌륭하셨다. 제가 너무 사랑했다”며 힘겹게 말을 꺼냈다.
길 할머니의 며느리는 “돌아가시기 전 1주일 동안 어머니는 감기에 시달리셨고 식사를 전혀 못하셨다”면서도 “가족들이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다 알아들으셔서 눈물도 흘리셨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인 문제가 얼른 해결되길 바라고, 정부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지만 후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주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라고 눈물을 감추며 말했다.
빈소 앞은 길 할머니를 애도하는 근조화환들로 가득찼다. 이중에는 또다른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의 화환도 있었다. 이 할머니는 이날 오후 빈소에 와 유가족들의 손을 붙잡고 위로를 건넸다. 유가족들과 함께 입관을 참관하기도 했다.
이 할머니는 “전날 소식을 듣고 한숨도 못 잤다”며 “길 할머니와 함께 일본 정부의 배상을 받기 위해 고통을 참고 노력해왔는데 결국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또 “할머니들이 다 죽기를 기다리는건지 너무 서럽다”며 “길 할머니 이제 다 잊어버리고 좋은 곳으로 가시라. 내가 (배상을) 받아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길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한 시민들의 발길도 계속됐다.
10여년간 수요집회에 참여해 길원옥 할머니와 인연을 쌓아왔다는 이모 (50) 씨는 퉁퉁 부은 눈을 가린 채 빈소에 들어섰다. 이씨는 “어제 뉴스를 보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됐다. 너무 놀라고 슬픈 마음에 오늘 반차 쓰고 서울에서 여기(장례식장)까지 왔다. 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면서 울먹였다.
이어 “집회에 나온 학생들을 맞아주시던 할머니의 모습, 김복동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황망해하시던 할머니의 모습들이 떠오른다”라고 덧붙였다. 이씨는 조문을 마친 뒤에도 빈소 앞을 바로 떠나지 못하고 몇분여간 복도를 서성였다.
신재철 부산외국어대 초빙교수는 길 할머니를 ‘친어머니 같은 분’으로 기억했다. 그는 “위안부 문제가 드러났을 때 일본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셨다. 존경한다”고 말했다.
평화나비네트워크 소속 대학생 20여명이 이날 오후 단체 조문을 오기도 했다. 이들은 저마다 노란 포스트잇에 길 할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를 적어 유가족에 전달했다.
홍익대에 재학 중인 강태성(24) 씨는 “2019년 길 할머니의 노래를 듣고난 뒤로 할머니의 과거를 알아보게 됐다”면서 “위안부 피해자로서 살아오신 할머니의 인생에 안타까움을 표한다”고 했다. 강씨는 포스트잇에 ‘할머니, 사랑합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원없이, 행복하게 노래 부릅시다’라고 적었다.
서울여대에 다니는 박민영(26) 씨는 “길 할머니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동아리와 세미나, 수요집회 등을 통해서 할머니의 아픔들을 공부해왔다”면서 “고인의 명복을 빌고, 우리 대학생들이 할머니의 명예와 인권, 평화로운 세상을 찾는 그날까지 열심히 투쟁하겠다”라고 전했다.
정치권에서도 길 할머니를 애도하는 물결이 이어졌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길 할머니 빈소를 찾아 조문록에 ‘편안히 영면하십시오’라고 남긴 뒤 영정에 헌화하고 묵념했다. 우 의장은 “일본 정부의 사과, 정당한 배상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셔서 착잡하다”며 “수요집회에서 본 길 할머니의 밝은 모습이 기억이 난다.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감동과 교훈을 얻었다”고 했다. 이어 “할머니께서 생전 위안부 피해를 알리기 위해 했던 활동들을 기억하겠다”며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그 뜻이 훼손되지 않도록 뒷받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가슴 아픈 역사를 넘은 보편적 인권의 문제”라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서 여생을 편하게 보내실 수 있도록 예우를 다하고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국제사회와 함께 끝까지 기억하고 부단히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길 할머니의 사진을 올리고 “비통한 마음으로 고(故) 길원옥 할머님의 명복을 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할머님의 용기와 실천을 이어받아 역사의 진실과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에 더욱 앞장서겠다”고 했다.
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7명으로 줄었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모두 240명인데, 이중 233명이 사망한 것이다.
생존자의 지역별 거주지는 서울과 대구, 경북, 경남 각 1명, 경기 3명이다. 연령별로는 90∼95세 2명, 96세 이상 5명이다. 평균 연령은 95.7세다.
길 할머니의 발인식은 18일 오전 9시 30분 인천적십자병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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