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카메라가 공포”…일본 차별주의자들의 표적 된 쿠르드인

홍석재 기자 2025. 2. 18.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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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일본 사이타마현 와라비역 인근에서 일부 일본인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재일 쿠르드인들을 상대로 혐오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본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 제공

“그들이 우리 사진을 찍으려는 게 마치 총을 겨누는 것처럼 공포스럽게 느껴져요.”

지난 4일 일본 수도권 사이타마현 와라비 지역의 한 식당에서 한겨레와 만난 쿠르드인은 이렇게 말했다. 대화 도중에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모습에서 그가 느끼는 두려움이 전해졌다. 와라비는 도쿄 시내 중심부에서 직선거리로 20㎞쯤 떨어진 지역이다. 이곳에선 최근 극소수 일본인 차별주의자들이 쿠르드인을 집중적으로 노려 극심한 ‘혐오 행위’를 벌이고 있다.

이 지역에서 일하거나 거주하는 쿠르드인의 모습을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무단 촬영한 뒤 막무가내로 ‘불법 체류자’ ‘범죄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인터넷에 올리는 식이다. “범죄 조직과 연루됐다”거나 “이 지역에 살인 사건이 잇따른다”는 근거 없는 주장뿐 아니라 “쿠르드인이 일본을 점령하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까지 퍼트리고 있다. 학생이나 어린이도 이들의 ‘표적’에서 예외가 아니다. 상점에 물건을 사러 가는 어린아이 사진을 찍은 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다”는 ‘가짜뉴스’를 소셜미디어(SNS)에서 확산시키기도 한다. 지역 관공서에 무차별적으로 전화를 걸어 “쿠르드인을 내쫓아라” “왜 쿠르드인에게 세금을 쓰느냐” 등 민원으로 업무를 곤란하게 만든 뒤 ‘이게 다 쿠르드인들 때문’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이날 찾은 와라비는 평범한 쿠르드인들과 일본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차별주의자들이 집회를 벌일 때마다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가 난무하는 무법지대가 된다. 이들은 한달에 한두차례 일장기와 욱일기를 앞세우고 “자폭 테러 단체를 지원하는 쿠르드 협회는 일본에서 떠나라” “일본인 살해를 예고한 쿠르드인을 체포하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소동을 거듭하고 있다. 이에 항의하는 쿠르드인들과 거친 말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혐오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은 과거 재일 동포나 중국인들을 상대로 헤이트 스피치를 벌였던 이들로 알려졌다. 형사처벌이 가능할 만한 불법행위는 드러나지도 않아 경찰은 이들을 막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뜻있는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외국인 혐오 시위를 몸으로 막는 ‘카운터’(대항 활동)로 쿠르드인들을 돕고 있다.

10명 안팎에 불과한 소수가 혐오 집회를 주도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온라인을 통해 재생산돼 근거 없는 외국인 혐오를 확산시키고 있다. 특히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는 차별주의자들이 재일 쿠르드인들에 관한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온상이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죽어라” 같은 혐오 표현뿐 아니라 “쿠르드인을 사냥하자”처럼 끔찍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악성 유튜버들이 쿠르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이닥쳐 마구잡이로 영상을 찍거나, 와라비 거리에서 근거 없이 쿠르드인들을 비난하며 ‘욕설 생중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쿠르드족은 ‘국가가 없는 최대 단일 민족’으로 유명하다. 현재는 이란·이라크·시리아 등 중동 지역에 3300만여명이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채 흩어져 사는 것으로 추산된다. 특히 튀르키예에 1700만명 정도가 사는데, 중동 각국은 쿠르드족 분리 독립 움직임을 극도로 경계한다.

쿠르드인들이 일본 사이타마현으로 본격 이주한 건 1990년대 초반께다. 특히 쿠르드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며 차별이 심했던 튀르키예 지역에서 많은 사람이 건너왔다. 일본의 단기 체류 비자 면제 제도를 이용해 와라비에 자리를 잡은 뒤 ‘난민 인정’을 요구하며 살아온 경우가 많다. 언어가 비슷한 이란인들이 이미 정착한 터라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게 많은 쿠르드인들이 와라비에 정착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도쿄 인근이어서 일거리가 있으면서도, 물가가 싼 까닭도 있다. 이들 상당수는 공사 현장에서 일본인들이 꺼리는 건물 해체와 폐기물 처리 등 궂은일을 맡는다. 이들은 “도쿄 근교 건물 해체의 70% 정도는 외국인 노동자가 맡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차별주의자들은 쿠르드인들이 운전하는 폐기물 트럭을 ‘쿠르드 자동차’ ‘불법 차량’ 등으로 비하한다고 한다. 한국인, 중국인들을 상대로 했던 노골적 차별을 쿠르드인들에게 되풀이하는 것이다. 와라비시 전체 인구는 7만5천명 정도이며 이 중 쿠르드인은 2천명 남짓 정도로 추정되는데, 극우 차별주의자들이 힘없는 소수 민족을 공격하고 있다.

쿠르드인들이 이 지역에 30년 넘게 집단 거주했지만 차별주의자들의 ‘표적’이 된 건 불과 2년이 되지 않았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또 다른 쿠르드인은 “갑자기 차별이 일어난 데는 특별한 이유도 없다”며 답답해했다.

추정되는 계기는 2023년 6월 일본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이 주도해 통과시킨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이다. 당시 개정안은 난민 인정 심사를 진행 중인 외국인도 세번째 신청 때부터는 강제 송환이 가능하다는 내용이 뼈대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법안이 통과되면 (난민 신청자들이) 본국에서 투옥, 고문, 학살 당한다” “목숨을 빼앗는 법안에 반대한다”며 국회에서 몸싸움까지 벌여봤지만 소용이 없었고, 지난해 6월부터 시행됐다.

개정법은 내용 자체가 문제였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일본 사회에서 크게 주목받지 않고 살던 쿠르드인들이 개정 출입국관리법 처리 과정에서 언론에 부각되면서 차별주의자들에게 ‘먹잇감’으로 떠올랐다. 2023년 7월 이 지역에서 쿠르드인들끼리 싸움을 벌인 게 기름을 부었다. 일본 우익 언론 산케이신문이 이 사안을 다루면서 “튀르키예 국적 쿠르드인들이 차별과 박해 등을 이유로 일본에서 난민 신청을 했지만 인정된 사람이 거의 없고 불법 체류 상태인 이들도 적지 않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를 한 것이다.

쿠르드인들을 지원하는 일본인 단체도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 시민단체 ‘재일 쿠르드인과 함께’에는 전자우편을 통해 하루가 멀다 하고 “쿠르드인들 탓에 치안이 나빠지고 있다” “쿠르드인을 모두 죽이겠다”는 폭언과 욕설이 이어지고 있다. 경찰 신고도 별 소용이 없었다. 메일 대부분이 발신지가 드러나지 않도록 손을 썼고, 우편으로 온 편지도 가짜 주소와 이름을 썼다. 일부 출처가 확인돼도 혐오 대상이 ‘특정 사람’이 아닌 쿠르드인이라는 ‘민족’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어서 형사처벌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극소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판을 벌인 차별 행위는 쿠르드족에게는 일상으로 확산하고 있다. 이름 밝히기를 꺼린 한 쿠르드인은 “조카가 학교에 갔다가 같은 반 아이들에게 ‘쿠르드인은 돌아가라’라는 말을 들었다”며 “많은 쿠르드 사람들이 ‘오늘은 인터넷에 내 사진이 올라오는 게 아닐까’를 걱정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이타마지방법원이 지난해 11월 재일 쿠르드인 단체가 낸 ‘사무실 인근 헤이트 시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재일 쿠르드인들로 구성된 ‘일본 쿠르드 문화협회’는 지난 12일 협회 사무소 주변에서 열린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시위에 대해 “헤이트 스피치에 해당하는 행위를 벌인 남성에게 활동 금지 조처와 550만엔(약 5200만원)의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사이타마지방법원에 제기했다”고 밝혔다. 와카스 치칸 협회 대표는 “일본 내 소수 민족과 외국인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고 싶다”고 말했다.

중앙정부가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거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라도 조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도쿄도는 2019년부터 헤이트 스피치를 금지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다만, 처벌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적다는 비판을 받는다. 재일 동포들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가 심각했던 가와사키시는 2020년부터 헤이트 스피치에 대해 최고 50만엔(약 480만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조례를 제정해 일정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일본 내 혐오·차별 문제를 추적해온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는 한겨레에 “일본 차별주의자들의 첫번째 표적이 과거에는 재일 한국인이었고 이어 중국인, 쿠르드인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피해를 입는 민족이 바뀔 수 있지만 가짜뉴스로 결국 누군가 혐오 피해를 입는다는 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며 “혐오 행위를 근본적으로 막을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와라비(사이타마)/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지난해 9월 일본 사이타마현 와라비역 인근에서 일부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재일 쿠르드인들을 상대로 혐오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일본 저널리스트 야스다 고이치 제공
재일 쿠르드인을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 ‘재일 쿠르드인과 함께’에 일부 일본인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쿠르드인은 돌아가라” “죽어버려라” 같은 끔찍한 글을 적은 쪽지를 보내오고 있다. 와라비(사이타마)/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재일 쿠르드인을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 ‘재일 쿠르드인과 함께’에 일부 일본인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쿠르드인을 모두 암살하겠다” 같은 끔찍한 글을 적은 편지를 보내오고 있다. 와라비(사이타마)/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재일 쿠르드인을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 ‘재일 쿠르드인과 함께’에 일부 일본인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2023년 여름께부터 혐오 발언을 적은 전자우편을 지속적으로 보내오고 있다. 와라비(사이타마)/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한 재일 쿠르드인이 일부 일본인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재일 쿠르드인들을 상대로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가짜뉴스들을 보여주고 있다. 와라비(사이타마)/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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