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예산 삭감'에 불안해진 美 학계…일부 낙관론 전망도

미국 과학계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구 자금 삭감 압박에 맞서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17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지난주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 회의에서 과학자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과학 정책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공유했다.
이번 연례 회의에선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위협이 논의됐다. 인공지능(AI)의 폭주, 독성 화학물질, 그리고 우주의 종말까지 거론됐다. 무엇보다 시급한 위협으로 꼽힌 것은 과학계를 겨냥한 공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연방 과학 인력을 감축하고 대학 연구를 위한 예산 수십억 달러를 삭감하고 있다.
수디프 파리크 AAAS 회장은 현재 미국 과학계의 분위기에 대해 “불안과 우려 그리고 상실감이 감돈다”며 “정부 기관의 해고 소식이 회의 참석자들의 휴대전화로 계속 전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로즈 와키모토 미국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연구 담당 부총장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 기분”이라며 과학계를 둘러싼 위기 상황을 표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몇 주 만에 대학을 비롯한 연구기관에 강력한 규제를 시행하고 있다. 다양성 정책을 겨냥한 단속, 대학 기금에 대한 불안정한 공급, 서류 미비 학생들에 대한 규제 강화 등이 연구 현장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조치들이 막대한 연구 자금을 제공하는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국립과학재단(NSF)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이 두 기관은 매년 수천 개의 연구 프로젝트를 지원하며 수십만 명의 연구자와 대학 연구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NIH와 NSF의 지원은 암 치료 연구, 해수면 상승 대응, 양자 컴퓨팅 개발 등 미국 과학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여겨진다.
트럼프 행정부는 NIH 예산에서 40억 달러(5조 7632억원)를 삭감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연방 법원이 현재 이 계획의 시행을 보류시켰지만 대학 관계자들은 비슷한 조치가 다른 연구 기관에서도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 대학 관계자는 “이러한 조치가 강행되면 연구 기관과 지역사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홀든 소프 사이언스 편집장은 “미국이 세계적인 과학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본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 있었다”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는 바로 상업화되지 않는 기초 연구에도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지만 지금 정부는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결국 대학들이 연구 활동을 축소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는 미국 과학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NIH 자금 삭감이 연구 자체를 줄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1기 행정부에서 과학기술 정책을 자문한 기상학자 켈빈 드로게마이어는 AAAS 회의에서 “과학자들은 행정 규정을 맞추느라 연구 시간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다”며 “효율성을 높일 기회가 많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소프 편집장은 “연구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 쉽지 않을뿐더러 연구비를 갑자기 줄이는 것은 시스템을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보스턴 회의에는 3500명이 넘는 과학자와 연구자들이 참석했다. 회의장 곳곳에서는 “이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란 주제를 둘러싼 논의가 오갔다. 정부와 공조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메리 울리 리서치 아메리카 대표는 “트럼프 행정부가 반(反)과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과학의 중요성이 미국의 세계 경쟁력을 높인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정부와 협력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 시절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에서 근무했던 게이 코이즈미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학 공격'을 통해 과학 연구가 ‘부수적 피해’를 입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 조치들이 과학 자체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트럼프 정부가 깨어있는 정책과 문화를 배격하려는 과정에서 과학 연구까지 타격을 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가장 타격을 입은 연구 분야로는 기후환경이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류가 초래한 기후변화의 위협이 과대평가됐다는 입장을 여러 번 피력한 바 있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해양대기청(NOAA)에 기후과학, 기후위기, 청정에너지, 오염 등의 용어가 포함된 연구 지원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기후과학 연구자들은 생존을 고민하고 있다.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 스크립스 해양연구소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오로라 로스는 “박사 학위를 마친 후 연구소에 지원하려 했지만 1년 안에 연구 기관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그녀는 연구비 신청서를 작성할 때 ‘기후변화’라는 단어를 피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이 너무 힘들다”고 털어놨다.
일부 과학자들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켈리 크로닌 미국 조지아주립대 지질학 교수는 자신의 전 직장이었던 조지아 서던대가 최근 '지구·환경·지속가능성 학부'를 신설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조지아 서던대는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한 조지아주 스테이츠버러에 위치하고 있다”며 “대부분의 학생들도 남부 지역 출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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