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seas Trip] 남인도 여행③ 케랄라주 두 번째 이야기
초크라무디 봉우리 정상에서 본 일출
해발 1,700미터에 위치한 매투패티 호수
남부 바르칼라 해변 마을에서 즐긴 휴식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한 일출 트레킹
지난밤 숙소에서 만난 이스라엘 여행자의 제안으로 느닷없이 일출 트레킹을 하게 됐다. 여행은 체력과의 싸움이다. 자정 넘어 잠들었다가 새벽 4시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어렵사리 침대를 벗어나 4시 30분 출발에 맞추기 위해 단장을 시작했다. 단장이라고 해 봤자 고양이 세수가 전부. 하지만 계획대로 실행될지는 미지수다. 트레킹 시작 지점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교통수단을 아직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문장에는 ‘무엇이든 시도해봐도 좋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결과는 오직 신께 맡기고서. 그렇게 또 한번의 불확실성이 확실한 결과로 이어졌다. 길에서 만난 행인의 도움으로 그가 여러 번 지인에게 전화 통화를 시도했고 마침내 우리 앞에 운전사가 등장한 것.
초크라무디 봉우리(Chokramudi Peak)는 해발 약 2,200미터에 위치한, 문나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하나다. 오토릭샤를 타고 1시간여 달리면 트레킹 시작 지점에 닿는다. 그곳까지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는 동안 하늘에 촘촘히 막힌 별이 쏟아질 듯 강렬한 기세를 뿜어냈고,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갈수록 마치 별에 부딪힐 것 같은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분주하게 1시간을 훌쩍 넘겨 산행한 끝에 첫 번째 봉우리 정상에 도달했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태양의 붉은 원 상단이 지평선에 걸쳐지는 순간. 그 붉은 기운 아래로 푸른 계곡과 무성한 차 밭, 크고 작은 산맥이 어우러진 탁 트인 전망이 눈에 들어왔다. 태양의 뜨거운 기운을 오롯이 품으며 눈앞에 새로이 피어난 삶의 가능성을 느낀다. 모든 가능성은 내 안에 있다.

며칠간 문나르를 여행하면서 다짐한 게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기필코 오토바이 운전을 배우고 면허를 따야겠다’고. 문나르 여행 최적의 교통수단은 단연코 오토바이다. 낮은 속도로 유려한 차 밭을 가로질러 푸르른 자연환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자전거도 좋지만 가파른 오르막을 계속해서 넘을 자신이 없다. 오토바이의 장점은 비용 면에서도 효과적이다. 문나르 도심이나 그 주변이 아니고서는 공공 버스 이동은 불가능하다. 도심과 멀리 떨어진 여행명소에 가려면 운전사가 딸린 자가용이나 오토릭샤를 빌려야 하는 이유다.
문나르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로 계획한 매투패티 호수(Mattupatty Lake)에 가려면 오토릭샤를 예약해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 숙소 직원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타게 됐다. 마침 호수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외출에 나선 그가 동행을 허락했다. 호수까지 1시간 남짓 씽씽 달리는 동안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몸의 모든 감각이 살아나는 기분과 동시에 살아있는 기분을 만끽했다.

문나르 도심에서 약 13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1,700미터에 위치한 호수는 목가적인 언덕에 자리 잡아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마음을 녹인다. 무성한 차 밭은 물론이고 그림 같은 저수지가 문나르 도심 주변과는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 평온함을 자아내며 자연 속에서 평화로운 휴양지를 찾는 관광객에게 인기 있는 장소다. 안개가 짙게 낀 날의 호수는 신비로운 매력까지 더한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호수는 여행지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문나르 전역 차 농장에 물을 대는 댐의 기능을 수행한다. 1940년대 후반 건설된 매투패티 댐은 수력 발전과 관개시설을 목적으로 물을 보존하기 위해 건설된 콘크리트 중력 댐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중요한 관광명소로 부각되기 시작한 차 공장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찻잎을 따는 것에서부터 최종 제품을 포장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생산과정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공장 한편에 자리한 티 숍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차를 시음하고 원하는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문나르를 떠나 케랄라주 두 번째 목적지로 정한 곳, 바로 바르칼라(Varkala)다. 케랄라주는 약 580km에 걸쳐 긴 해안선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해변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 중 바르칼라는 요즘 가장 핫한, ‘핫플 비치’로 각광받고 있는 마을이다. 문나르에서 남쪽으로 약 2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는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온라인상에 모든 표가 매진으로 표기된 상태라 일단 기차역 티켓 창구로 가서 현장 발권을 진행했는데, 결과적으로 다행히 기차표를 손에 넣긴 했지만 문제는 속도가 가장 느린 기차인 데다 에어컨이 없는 ‘꼴등석’ 칸에 탑승하게 됐다.
인도 기차 등급은 굉장히 세부적인 구조를 가진다. 각 칸마다 에어컨이나 침대, 칸막이 등의 유무로 가격이 정해지고, 침대 칸의 경우 침대 위치에 따라서도 가격이 달라진다. 기차 칸에 있다 보면 인도의 신분질서를 나누는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성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카스트의 하위계급인 ‘수드라’는 노예로 대표되는데, 꼴등석에 앉아 있는 4~5시간 동안 어떻게든 노예 신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노예의 삶을 가장 힘들게 하는 요소는 찌는 듯한 더위다. 영상 33도를 웃도는 무더위 속에서 기차가 달릴 때마다 오죽하면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말로 표현이 안 된다. 기차가 역에 정차하는 시간이 길어져 뜨거운 바람조차 허락되지 않을 땐 노예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만 갔다. 끔찍한 경험도 끝에 다다르면 안도의 한숨으로 바뀐다. 어쨌든 잘 버텼다.

이 신생대 퇴적암 절벽은 그렇지 않은 여느 평평한 케랄라주 해안에서 유독 눈에 띈다. 이는 케랄라주 남부에서 바다에 인접한 절벽이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해변의 독특한 구조적 특징뿐만 아니라 케랄라주의 다른 번화한 해변과는 달리 고요하고 평화로운 휴양지라는 점이 시크릿 비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바르칼라 해변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쉼’이었다. 한적하고 고요한 해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케랄라주 여행을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문나르의 차 밭은 황홀한 경험을 선사해줬지만 반면 넘쳐나는 관광객들로 인해 뜻하지 않게 사람구경 또한 넘치게 해야 했다. 한편으론 여러 다양한 부류의 로컬 관광객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인도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의 훌륭한 조언과 팁이 아니었다면 바르칼라 해변으로 향하지도 않았을 테니. 인과관계가 명확해지는 여행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된다. 여행도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고 쌓여간다. 휴식을 이유로 찾은 해변은 그에 응당한 환경을 내어준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바르칼라 해변을 찾은 누군가는 단박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이곳 마을은 크게 북부와 남부 지역으로 나뉜다. 이들 각각 노스 클리프(North Cliff)와 사우스 클리프(South Cliff)로 불리는데, 북부 지역은 클럽과 레스토랑, 호화로운 호텔, 기념품 상점 등이 자리해 활기찬 분위기로 북적거리는 반면 남부 지역은 편의시설이 별로 없는 시골 풍경이 주를 이룬다.

바르칼라 해변은 예로부터 이곳에 몸을 담그면 여러 전생에 쌓인 모든 죄가 한꺼번에 사라진다고 알려진 영적인 장소다. 비로소 영혼이 죄에서 해방된다는 얘기다. 이러한 전설의 영향으로 ‘죄의 파괴’를 뜻하는 힌디어인 ‘파파나삼(Papanasam)’ 해변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며, 인도에서는 바르칼라 해변을 ‘남부 바라나시(힌두교의 중심지이자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매년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며 죄를 씻는 곳)’라고 칭하기도 한다.

현지인들에 섞여 바다에 몸을 담그며 생각했다. 내 영혼은 과연 죄에서 해방되었을까? 그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로써 케랄라주 여행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사실이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7호(25.02.18)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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