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지 않은 왕관의 무게,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
스크린‧OTT 오가며 세계관 확장…진입장벽 높아
(시사저널=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어벤져스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는 여전히 분주하다. MCU의 새로운 영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이하 《캡틴 아메리카 4》)는 그간 어벤져스에서 팔콘으로 활약했던 샘 윌슨(안소니 마키)이 캡틴의 상징인 방패를 전승받은 뒤 캡틴 아메리카로서 본격적으로 맞이하는 스크린 데뷔 무대다. 그에게 비브라늄 방패는 왕관이자 그림자, 자부심이자 버거운 무게다.
이번 영화는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성공적 캐릭터 안착 측면에서도, MCU 전체로서도 중요한 시험대다. 세계관을 계속 넓혀 어느덧 페이즈6 작품들의 공개를 앞둔 마블 스튜디오로서는 《어벤져스: 엔드게임》(2018) 이후 흥행과 비평 면에서 긴 침체기를 겪었던 부진을 털어내야 하는 시기다. 영웅의 자격 증명과 현실세계의 풍경들 그 어딘가에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는 존재할 수 있을까.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초인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고뇌
MCU 내에서도 《캡틴 아메리카》 시리즈는 언제나 정치 스릴러의 성격이 두드러지는 영역 안에 있다.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해 탄생한 '슈퍼 솔저'라는 캐릭터의 태생적 배경 때문이다. 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가 냉전 시대부터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의 세력 히드라와 싸워왔다면,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인 샘 윌슨은 미국 정부와 손잡고 혼란한 국제정세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다. 과거 어벤져스 해체에 앞장섰고 군 장성 출신으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새디우스 로스(해리슨 포드) 같은 강성파와 왜 손을 잡느냐는 질문에, 샘은 이렇게 답한다. "이 나라는 길을 잃었어요. 그런 사람일지라도 (캡틴 아메리카가) 대통령과 함께하는 게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요."
희망을 주는 일, 나아가 희망의 증거가 되는 일. 이는 샘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 가시밭길이다. 스티브 로저스를 비롯한 선대 슈퍼 솔저들과는 다르게 샘은 신체 능력을 초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혈청을 주입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다. 그는 애초에 초인이 아닌 자신이 미국, 나아가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인지 무수히 반문한다. 영화는 애초에 그간 MCU에서 크리스 에반스가 연기했던 기존 캡틴 아메리카의 그늘이 얼마나 짙고 큰 것인지를 숨기지도 않는다. "자네는 감당 못 할 일이었어.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니까." 노골적인 비교들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샘의 얼굴이 이를 방증한다.
《캡틴 아메리카 4》는 캡틴의 자리가 능력을 한참 벗어나는 일임을 잘 알기에 언제나 "증명해야 하는 기분"에 시달리는 샘의 심리적 고뇌를 중심에 둔다. 여기에 얽히는 이가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또 한 사람, 새디우스 로스다. 대통령이 된 이후 그는 과거를 교훈적 발판 삼아 포용력과 공존을 모색하려 한다. 인도양의 셀레스티얼 섬에서 발견된 새로운 물질인 '아다만티움'을 특정 국가가 독점하는 대신 자원을 공평하게 배분하자는 조약을 체결하는 일이 당장 그의 앞에 닥친 과제다.
그러나 평화는 곧 깨져버릴 위기에 처한다. 백악관 초청 행사에서 로스 대통령 피격 사건이 벌어지고, 현장에서 선대 슈퍼 솔저이자 샘의 조력자 이사야 브래들리(칼 럼블리)가 체포된다. 이사야가 알 수 없는 힘에 조종당해 일어난 일임을 직감한 샘은 사건의 배후를 찾기 위한 조사를 시작한다. 한편 아다만티움을 둘러싼 조약 체결을 앞두고 일본은 미국에 등을 돌리고, 과거 로스에게 억압당했던 뇌과학자 새뮤얼 스턴스(팀 블레이크 넬슨)의 계략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지며 세계는 전쟁 발발 위기를 맞는다.
이번 영화에서 캡틴 아메리카는 비브라늄 방패뿐 아니라 날개를 장착한 윙슈트를 입는다. 지상전에 이어 공중전까지 추가된 액션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적의 위치나 건물의 구조 등을 파악하는 정찰기 '레드윙'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새롭게 팔콘이 된 호아킨 토레스(대미 라미레즈)와 함께 적진을 누비는 액션은 슈트가 없던 시절의 캡틴 아메리카의 액션 스타일을 고수하기보다는 MCU 작품다운 활력을 선택하는 쪽으로 더 집중한 듯 보인다. 고인이 된 배우 윌리엄 허트가 연기했던 캐릭터인 로스를 해리슨 포드가 이어가는 전략도 나쁘지 않다.
현실세계와의 무수한 접점들, 득인가 실인가
문제는 높아진 진입장벽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주요 캐릭터들의 배경과 역사가 아는 만큼 보이는 MCU 특유의 세계관은 이제 부담으로 느껴지는 수준이 된 지 오래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 이후 샘이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로 활약하는 모습은 이번 영화 이전에 OTT 플랫폼 디즈니+의 시리즈 《팔콘과 윈터솔저》(2021)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다. 팔콘이 된 호아킨, 윈터솔저로 활약하는 버키(세바스찬 스탠), 이사야 등과의 인연도 여기에서 먼저 다뤄졌다. 이번 영화만으로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한 범위로 정리되어 있긴 하지만, 스크린과 OTT를 오가며 세계관을 확장하는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온전히 흡수되지 않는 영역은 여전히 존재한다.
전작들이 남긴 왕관의 무게를 잘 지탱했는지도 내내 의문이다. 영화 속 샘이 느끼는 중압감은 상징적 방패를 물려받았기 때문인데,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 안소니 마키가 지니는 현실의 그것과 계속 공명하는 인상을 남긴다. 완벽하지 않으면 이 자리를 희망했던 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될까봐, 나아가 자신에게 방패를 넘겨준 것이 스티브의 실수로 여겨질까봐 괴로워하는 샘의 인간적 고뇌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안소니 마키를 향한 의문으로 의도치 않게 번지는 순간들이 있다. 이것은 영화 속 샘의 고충인가, 영화 밖 배우의 고충인가.
"스티브가 믿음이라면 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줘." 샘에게 전하는 버키의 한마디는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어깨를 두드리는 격려지만, 이는 대사로서 직접 제시될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감흥이어야 했다. 샘은 존엄과 명예를 갖춘 진중한 인물이지만, 그런 점에서라면 이미 블랙 팬서가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둔 지 오래다. 스티브 로저스가 아닌 샘 윌슨에 열광하기엔, 아직 그만의 또렷한 개성과 인간적 매력은 희미하다.
예고편에서 공개된 후 이미 현지 소셜미디어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듯, 미 대통령이 '레드 헐크'로 변한다는 설정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취임 이후 미국의 현재를 대입하게 만드는 어쩔 수 없는 배경이다. 분노에 못 이겨 백악관을 거의 초토화시키는 레드 헐크를 단순히 MCU 속 캐릭터로만 바라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서로의 선의를 보지 못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는 캡틴의 대사와 공존을 강조하는 영화의 메시지가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 의문이다. 공교롭게도 공화당이 모든 다양성을 저격하고, 공격적인 미국 우선주의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는 시국의 '트럼프 보유국' 작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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