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한파보다 매서운 ‘무존중’…지하철역 바닥에 앉아보니 [인기척]
거리노숙인 12.1% "피해 경험 있다"…노숙인에게 편견 아닌 존중 필요해
지하철역에 6시간 앉아보니…바닥 냉기와 사람들의 무관심에 '심리적 위축'
지난 10일 오전 9시 30분, 충무로역에는 승차권 발매기 앞에 긴 줄을 선 외국인들과 캐리어 바퀴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관광지로 유명한 명동과 을지로에 인접한 충무로역은 직장인은 물론 외국인의 발걸음으로 많이 붐비는 곳 중 하나입니다.
올겨울 처음으로 한강이 결빙됐다는 전날 기상청의 발표를 증명하듯, 이날도 계속된 입춘 한파에 한국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하나같이 털장갑과 목도리로 무장한 모습이었습니다. 충무로역이 위치한 필동 2가의 이날 오전 체감온도는 영하 10도였습니다.
하지만 ‘충무로 할머니’는 오늘도 같은 차림입니다. 충무로역에는 외국인만큼 자주 볼 수 있는 분이 또 계십니다. 3번 출구 방향에 있는 편의점을 끼고 귀퉁이를 돌면 수많은 인파 속 가만히 자리를 지키시는 할머니가 그 주인공입니다. 얼굴이 발끝에 가 있을 정도로 허리가 굽으신 할머니는 항상 큰 옷핀 세 개가 고장 난 지퍼를 대신한 검정 패딩을 걸친 모습입니다.
할머니는 신발도 없이 이곳에서 오래 생활하셨습니다. 작년 6월부터 충무로역에서 청소일을 하시는 50대 여성 A씨는 이곳에서 일을 시작한 날부터 할머니를 계속 봐왔다고 말했습니다. A씨는 할머니께서 추울 때는 “여자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 계시든가 아니면 여기(3번 출구) 계시든가 한다”고 했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친구들과 남산을 오른다는 구모 씨(83세·남)는 몇 년도 더 된 일이라 말했습니다. 구 씨는 할머니를 말도 안 통하는 ‘이상한 아줌마’라고 부르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습니다. 그는 “내가 (역내) 사무실에 가서 ‘제발 좀 이 안에는 못 들어오게 해라, 여기 외국인들을 많이 다니는데 보기 안 좋다’(라고) 사무실에 두 번이나 얘기했다. 그런데도 저 아줌마 몇 년이나 저렇게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 홍삼 안 좋아하는데...”
하지만 할머니는 구 씨가 말한 ‘이상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폭설이 내린 지난 설 연휴 따뜻한 꿀홍삼 음료를 가지고 처음 인사를 드릴 때 할머니는 또렷한 목소리로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음료는 마음만 받겠다면서도 앞으로 지나칠 때마다 인사하자고 먼저 약속을 청하셨습니다.
지난 8일 오전에도 데운 두유를 들고 찾아갔지만, 여전히 음료는 꺼리셨습니다. 두유가 따듯하니 손에 쥐고 있으라고 권하자, 할머니는 “손은 괜찮은데 발이 춥지”라고 답했습니다. 대신 항상 피곤하신 듯 찌푸려진 눈과 인중은 기자와 대화를 이어가면서 점차 누그러지셨습니다. 그렇게 충무로역을 지나칠 때마다 안부 인사를 드리며 안면을 텄습니다.
“사람의 본능이 몇 가지 있는지 알아?”
할머니께서 기자에게 대뜸 물었습니다. 식욕, 수면욕, 성욕에 이어 할머니는 ‘미워하는 것’도 사람의 본능이라 말했습니다. 타인을 미워하는 게 인간의 본능임을 할머니는 직접 경험하신 듯했습니다.
“할머니가 이렇게 (앉아) 있는데, 어떤 여자가 할머니한테 발차기를 해서 옆으로 쓰러졌어.” 할머니는 지난 12월 14일, 한 행인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이어 재작년 숙대입구역에서의 아픔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노약자석에서 창문을 향해 앉아 있는데 우산대로 여기(이마)를 죽어라 때렸어. 어찌나 아픈지...비명도 못 질러. 불덩어리가 와서 닿는 거 같아.” 그러면서 할머니는 죽을죄를 지었더라도 “절대 사람 몸에 손 갖다 대지 말아야 돼”라고 당부했습니다.
보건복지부 <2021년도 노숙인 등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충무로 할머니와 같은 거리노숙인 12.1%가 노숙생활 중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거리노숙인은 다른 시설 입소자(8.1%)나 쪽방주민(6.1%)에 비해 피해 위험에 더 많이 노출돼 있습니다. 피해 경험 중에서는 구타 및 가혹행위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아픈 상처를 지닌 만큼 기자의 인사가 반가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다녀도 (인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천 명 중에 한 명 있나”라면서 잠시나마 말동무가 되어준 기자에게 “도령(기자)은 참 똑똑해”라고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그동안 인사드릴 때마다 기분이 좋으셨냐고 묻자, 할머니는 주저 없이 “응”이라고 답했습니다.
그제(14일) 오전 10시 15분, 영상 3도로 추위가 조금 풀린 이날은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기 위해 3번 출구 귀퉁이에 앉아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할머니처럼 패딩 외에는 방한용품을 사용하지 않은 채, 볼일도 역내 지하 화장실을 이용했습니다.
오전 10시 20분, 자리에 앉은 지 5분 만에 내복과 바지의 존재가 무색할 만큼 엉덩이에 감각이 사라졌습니다. 20분이 지나자, 손·발끝이 시리다 못해 찌릿해졌습니다. 손은 서로 감싸면 됐지만, 발가락은 꼼지락거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더 차게 느껴졌습니다. 손보다 발이 더 시리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3번 출구에는 동파 방지를 위한 유리문이 설치돼있지만, 많은 인파가 오가기 때문인지 문이 개방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들락날락하는 찬바람은 4겹이나 층층이 껴입은 옷들을 비웃듯 몸 전체를 휘감았습니다.
체온을 유지하고자 몸이 점점 웅크려지면서 허리는 굽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땅으로 향했습니다.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더해지자, 심리적으로도 위축됐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쳐다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오전 11시 15분, 앉은 지 1시간이 되자 온몸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아침을 먹고 왔음에도 평소보다 빨리 배고픔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점심은 호주머니에 있는 사탕입니다. 중간에 다녀온 화장실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간이 지날수록 3번 출구의 냉기가 점점 매섭게 느껴졌습니다.
2시간이 지난 12시 15분. 북적이는 인파와 지하철역 소음에 쉽게 잠들 수 없을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배고픔과 추위로 인해 몸에 힘이 빠지고 눈이 감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로는 힘들다고 판단, 결국 맞은편 벤치에 앉아 할머니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자리를 옮겼음에도 다리의 냉기는 여전했습니다. 뼈가 시렸습니다. 냉기는 기자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에도 한참을 남아있었습니다.
이날 기자는 총 6시간 동안 충무로역 3번 출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기자 바로 앞에 있는 공중전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기자에게 말을 걸거나 안부를 묻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기자는 6시간 동안 충무로역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인기척은 MBN '인'턴 '기'자들이 '척'하니 알려드리는 체험형 기사입니다.
[김경태 디지털뉴스부 인턴기자 dragonmoon20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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