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내 집 엿봤다” 줄소송… 700년 전 ‘프라이버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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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상인 '트래페'와 하인들이 내 정원을 들여다볼 수 있다."
1341년 7월 13일 영국 런던 '방해죄 재판소'엔 이 같은 고소장이 접수됐다.
'이사벨'은 이웃 트래페가 깨진 창문 틈으로 자신의 집 정원을 훔쳐본다고 주장했다.
무단 침입처럼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더라도 일상이 방해받는다면 법적 조치를 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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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 확산되며 편지-일기 유행… 읽고 쓸 ‘자기만의 방’ 욕구 커져
현대엔 SNS 등으로 사생활 전시… “스스로 감시하는 세상으로 변모”
◇사생활의 역사/데이비드 빈센트 지음·안진이 옮김/256쪽·1만7500원·더퀘스트
1341년 7월 13일 영국 런던 ‘방해죄 재판소’엔 이 같은 고소장이 접수됐다. ‘이사벨’은 이웃 트래페가 깨진 창문 틈으로 자신의 집 정원을 훔쳐본다고 주장했다. 이사벨은 또 이웃 드소프가 저택 창문 7개를 통해 자신의 집을 본다며 다른 소송을 제기했다. 이웃 드레체가 담장 위로 육중한 망루를 세워 자신의 일상을 훔쳐본다고 했고, 이웃 조앤이 집에 난 12개의 작은 구멍으로 자신의 사적 행동을 엿본다고 소송을 냈다.
언뜻 받아들여지기 힘든 억지 주장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판소는 현장 방문을 진행했다. 이어 이웃들 모두 40일 이내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무단 침입처럼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더라도 일상이 방해받는다면 법적 조치를 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사생활’이 처음으로 법적인 인정을 받은 순간이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사생활의 미시사를 다룬 대중역사서다. 영국 왕립역사학회이자 역사학자인 저자가 약 700년에 걸친 사생활의 변천사를 날카롭게 추적했다.
중세 사람들은 기도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사생활을 원했다. 교회에 나가는 공동체적 신앙생활과 별개로, 자신이 홀로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세 시대 개인 기도에 대한 안내서엔 “홀로 바라는 바를 주께 간청해야 한다. 누구와도 함께 있지 않고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혼자 들어가야 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눈여겨볼 건 사생활도 ‘부자’에게만 허락됐다는 점이다. 귀족들은 집에 기도실이나 독방을 만들었다. 뇌물, 간통 등 부정을 저지르기 위해 하인의 출입을 금하는 방도 있었다. 외부와 격리된 정원, 저택을 둘러싼 높은 담장도 부의 상징이었다. 가축과 함께 사는 하인이나 한 방에서 함께 사는 서민에겐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문해력’도 사생활 발전에 도움을 줬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이들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지 않고 책을 통해 정보를 습득했다. 직접 마주하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감정적인 대화도 나눴다. 문자를 읽고 쓰는 일이 일상화되면서 공동체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공간을 형성하려는 개인의 욕구가 강해졌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편지, 일기, 개인 서재 등이 점점 보편화되면서 개인의 사적 생활이 더욱 강화됐다.”
현대사회에 들어서 사생활은 큰 위협을 받고 있다. 한 예로 전화의 등장으로 도청 기술이 발달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발달하면서 개인정보 유출도 빈번해졌다. 소셜미디어엔 개인의 사생활이 마구잡이로 공개된다. 저자는 대기업과 국가의 감시 체제가 커지면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묘사된 ‘빅 브러더’처럼 우리에게 사생활이 사라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인간은 스스로 감시당하는 삶을 선택하고 있다.”
2016년 현지에서 출간된 책이라 최근 디지털 감시 체제 등에 대한 논의를 충분히 포함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하지만 모바일 메신저로 온갖 정보가 넘나드는 시대에 맞게 사생활에 대한 고찰을 쉽게 풀어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최근 중국 인공지능(AI) 딥시크를 통해 민감한 정보마저 유출될 가능성이 제기된 상황이라 책 내용이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사생활 보호는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논의가 얽힌) 사회 전체의 문제다. 방해받지 않는 삶을 향한 인간의 갈망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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