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언론부터 무장투쟁까지 이끈 전천후 독립운동가

2025. 2. 1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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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⑭ 우강 양기탁
우강(雩岡) 양기탁은 1871년 평양 소천에서 한학자인 부친 양시영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양시욱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한문을 배웠고 1886년 제중원 학생 선발시험에 합격해 상경한 후 영문·제약·의술 등을 배우다 퇴교하고 독학으로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원산에서 선교사 게일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참여했다. 게일은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했고 기독교 교육의 요람이 되었던 연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를 맡았다.

선생은 서재필 등이 1896년 설립한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1898년에는 제국주의 침탈에 반대하는 민중운동인 만민공동회 간부로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선교사의 알선으로 일본과 미국에 체재하면서 서양문물을 접하고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기르게 된다(시기와 체제국에 관련해선 다른 기록도 있음). 1902년에는 민영환·이준·이상설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개혁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1904년부터 궁내부 예식원 번역관보로 일하면서 일본의 침략계획을 목도하고 ‘보안회’ 운동에 참여해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철회시키는 등 본격적인 민족운동에 나서게 된다.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 철회 시켜
계몽언론의 상징이자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진력한 독립운동가 우강 양기탁 선생. [중앙포토]
열강의 세력다툼에 휘말리던 대한제국은 대외에 국내사정을 알릴 수 있는 영자신문 발행을 위해 영국인 기자 베델을 발행자로, 선생을 실무책임자로 선정해 1904년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이듬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예식원을 사직하고 신보 발행에 전념하게 된다. 선생은 당대의 논객인 박은식·신채호 등을 논설위원으로 초빙해 반일 논설과 기사를 과감하게 실었다. 신보는 을사조약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파기를 요구했고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즉각 전재했으며 의병활동을 상세히 보도하는 등 구국언론의 중심축이 되었다.

일제의 침탈이 강화되던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논의하고 국권회복과 공화제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신민회’ 조직에 나선다. 총감독 양기탁, 총서기 이동녕, 재무담당 전덕기, 회원자격심사 집행원 안창호를 선임하고 언론·기독교·교육·실업계와 무관 출신 인사 등을 망라해 조직이 결성되었다.

선생은 신민회 활동을 이끌었고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의 기관지이자 본부역할을 했다. 일제는 본격적인 대한매일신보 탄압에 나섰다. 발행자 베델은 통감부에 의해 영국 영사관 재판에서 근신형에 이어 감금형을 받았다. 이어 대한매일신보가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게 되자 1908년 통감부는 횡령혐의를 조작해 선생을 구속했고 영국측과 외교문제로 확대되자 석방했다.

1909년 신민회는 선생을 중심으로 만주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키로 뜻을 모으고 이동녕·이회영·이상룡 등이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로 우선 망명했다.

대한제국은 대외에 국내사정을 알릴 수 있는 영자신문 발행을 위해 영국인 기자 베델을 발행자로, 양기탁을 실무책임자로 선정해 1904년 7월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사진은 대한매일신보 16호. [사진 위키백과]
그러나 1911년 1월 안중근 의사 사촌동생 안명근이 독립군 군자금을 모금하다 적발된 ‘안악사건’으로 신민회 회원 등 160여 명이 일제에 검거되고 선생도 별도 체포되어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다. 일제는 다시 ‘105인 사건’을 조작해 신민회 인사들을 대거 투옥·기소해 선생 등 6인은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집단망명과 독립군기지개척 사업은 타격을 받게 된다.

1915년 4년 만에 출옥한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서 은신하다 유하현 고산자에 정착해 독립운동 전면에 나선다.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바 선생은 애국지사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통합운동을 전개했고 안동여관을 거점으로 광복회의 의열투쟁도 지도해 나갔다. 이후 1917년 연해주 ‘한인신보’ 창간 편집인으로 추대되면서 연해주와 만주를 아우르는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다.

1918년 만주 일대의 동포사회를 아우르는 통일기관으로 고려국 건립 계획을 추진하던 선생은 천진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중국거류 금지와 2년간의 유배처분을 받게 된다. 1919년 3·1운동 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내세워 사회단체와 신문사 설립을 허용하면서 선생은 동아일보의 고문 겸 편집감독으로 추대되었다.

일제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1922년 만주독립운동계는 선생의 만주 망명작전을 성공시킨다. 이후부터 선생은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주창하고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 등 남만주 단체가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다. 이후 산재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추진되었고 선생은 ‘남만촉성회’ 회장을 맡아 통합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노력 끝에 만주지역 통합단체로 ‘통의부’가 출범하면서 선생은 최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통의부는 통의부의용군을 조직해 군사활동에 나섰으나 공화주의를 지향하는 선생과 군주정을 주장하는 복벽주의간 내부갈등이 계속 되어 대한의군부와 육군주만참의부가 분리되어 나갔고 선생도 통의부를 탈퇴하게 된다.

선생은 1923년 길림으로 이주해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성단’을 조직해 고문으로 길림·장춘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다시 추진했다. 1924년에는 만주 한인의 교육, 경제자립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기 위해 손정도와 함께 ‘동우회’를 결성한데 이어 통의부·광정단·서로군성서 등 남만주지역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1924년 ‘정의부’를 결성하게 된다.

정의부는 신민부·참의부와 함께 만주 3부를 형성했고 한인들의 자치행정과 항일군사활동을 통할하는 남만주 최대 군정부로 등장했다. 정의부 결성을 주도한 선생은 원로이자 최고고문으로서 전면에 나서기보다 단체들간의 교섭과 조정, 동포들의 생활터전 마련과 생활 향상을 위해 진력했다. 이후에도 선생은 참의부·신민부 등 만주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에 나섰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만주·연해주 동포 생활 향상에도 심혈
일제의 감시대상 인물카드 속 우강 양기탁 선생.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1925년 임정 요청으로 정의부·신민부 인사들이 임정에 참여키로 하고 이상룡이 초대 국무령에 취임한 후 6개월 만에 사임하자 1926년 선생이 후임으로 선임되었으나 임정과 정의부의 갈등으로 취임하지 않게 된다. 1926년 선생은 정의부, 천도교 인사 등과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해나가기 위해 ‘고려혁명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고려혁명당은 주로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했으나 국내와 만주에서 간부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고 민족유일당 운동이 추진되면서 이듬해에 해체된다. 1929년 만주의 정의부·참의부·신민부 3부 통합운동이 일어나 일부 세력이 결집해 국민부를 결성했으나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함께 추진하던 민족유일당 결성이 결렬되자 선생은 상해에서 민족주의계열의 ‘한국독립당’에 가입해 활동하게 된다.

만주사변과 윤봉길 의사 의거 후 임정은 상해를 떠나 여러 곳을 전전했고 독립운동가들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남경·진강·항주·가흥 등 곳곳에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미국에서 독립운동자금이 도착하고 김규식이 돌아오자 선생은 임정 재건작업을 주도했고 1933년 말부터 1935년까지 약 2년간 국무위원과 임정수반을 맡았다. 임정에 합류한 선생은 조직을 정비하고 재정을 확보해 임정의 기능을 회복해 나갔으며 은신 중인 김구와도 협력에 나섰다.

연로해진 선생은 이듬해 국무위원을 사임하고 한국독립당 이사장을 맡아 민족대당운동에 나섰고 한국독립당·의열단·조선혁명당 등과 통합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하게 된다. 그러나 내부갈등 끝에 탈당한 후 민족대당운동에 진력하던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강소성의 고당암으로 들어가 투병 끝에 이듬해에 그리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68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선생은 수차례 옥고를 겪으면서도 항일언론의 선봉에 섰고 국내를 비롯해 만주·중국·러시아를 넘나들며 독립투쟁에 나섰으며 독립운동계의 통합에 일생을 바침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한·중 수교 후 1993년 강소성에서 묘소를 확인했고 1998년 유해가 봉환되어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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