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 의학칼럼] 또다시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되려는가?
직장인의 경우 ‘정당한 보상 체계’는 삶의 기반이자 자존감의 중심이다. ‘백의의 천사’인 간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의료 현장에서 간호사는 환자의 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는 핵심 인력이다. 응급실, 중환자실, 병동, 수술실 등 어느 곳에서도 간호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과 헌신은 정당한 보상으로 돌아오고 있을까?
전 세계적인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대한민국의 간호사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의료 현장을 지킴으로써 온 국민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덕분에 간호사들의 자존감은 한껏 높아졌지만, 이후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간호사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깝다. 게다가 이런 일이 의료 현장에서는 거의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고 있으니 더욱 큰 문제다.
병원에 입원을 해봤거나 외래도 다녀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간호사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입원 환자의 경우, 하루 중에 주치의건 교수건 ‘의사’를 만나는 시간은 회진 때 잠깐이지만 간호사는 하루 종일 환자 곁을 지킨다. 외래의 경우는 다소 비중이 다르지만, 역시 간호사를 만나서 처리해야 할 일이 월등히 많다. 이처럼 환자와의 접점에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 등이 월등히 많지만, 보상 체계는 현실과 전혀 동떨어져 있다. 간단하게 보건복지부에서 고시한 ‘건강보험 급여비용 내역’만 살펴봐도 한눈에 알 수 있다.
총 3천여 개에 달하는 요양급여 항목 가운데 간호사의 수가가 인정받는 주요 행위는 단 32개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신생아 모유 수유 등 기본진료로 4개, 주사료 6개, 처치 및 수술료 17개, 응급의료 수가 2개, 호스피스 2개, 요양병원 1개 등이다. 반면 의사는 ‘처치, 수술, 마취 등 관련 항목’ 2883개에서 수가를 인정받는다. 32 vs 2883. 기울어져도 너무나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닌가. 이는 곧 의료행위의 가치 평가에서 간호사의 기여도가 극히 제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뜻이다. 간호사가 제공하는 다양한 전문적인 간호행위는 환자의 회복에 필수적이지만, 그 가치는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불공정한 현실은 간호사들의 처우 악화로 이어진다. 높은 업무 강도와 낮은 보상, 열악한 근무 환경 속에서 많은 간호사들이 이직을 고민하고 있으며, 일부는 결국 임상을 떠나고 있다. 이는 의료 시스템 전반의 붕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문제다.
간호사의 역할이 존중받고, 그들의 노동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때 환자 안전도 보장될 수 있다. 더 이상 ‘헌신’과 ‘사명감’만을 강조하며 이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정부와 의료계가 나서서 간호사의 처우 개선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32 vs. 2883이라는 불공정한 숫자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공정한 의료환경을 위한 개혁이 절실하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은 자신의 저서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한다”라는 유명한 법 격언을 남겼다. 지난 20여 년 동안 우리 간호사들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싸워왔다. 덕분에 간호법이 제정되었고, 기본적인 권리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큰 산을 하나 넘었을 뿐,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간호법 제정을 가로막아 왔던 일부 단체들이 여전히 건재하다.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정된 간호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막는 것이다. 즉 32 vs 2883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도록 간호법을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2025년 2월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간호법이 제대로 작동함으로써 기울어진 운동장이 서서히 평행 상태로 되돌아오도록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차근차근 정리하고 제정하는 일이다. 또다시 ‘권리 위에 잠자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경림(간호법제정특별위원장·전 대한간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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