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라 작가의 배낭 속 물건 두 가지

임지영 기자 2025. 2. 14.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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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사진)의 〈너의 유토피아〉가 세계 3대 SF 문학상인 ‘필립 K. 딕 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1주년 1박2일 희망텐트가 끝난 날 소식을 들었다.
1월22일 정보라 작가가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무지개색 머리끈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정보라 작가가 배낭에서 주섬주섬 무지개색 띠와 손 피켓을 꺼냈다. 아침부터 참여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오이도역 추락 참사 23주기’ 집회 현장에서 사용했던 시위 물품이다. 지난 몇 년, 간간이 근황을 물을 때마다 정 작가는 집회 시위 현장으로 답했다. 10여 년간 강사로 몸담았던 대학을 상대로 낸 퇴직금·수당 지급 소송에서 일부 승소한 지난 1월8일에도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집회에 참석하느라 “추워서 1심 판결 따위는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렸다”라고 말했다. 인터뷰 날짜를 조율하면서도 혹시 오전에 데모하다 연행되면 “경찰서에서 좀 더 흥미로운 인터뷰가 가능할 것 같다”라고 했다. 다행히 그가 약속 장소에 ‘무사히’ 도착했다.

최근 그의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가 세계 3대 SF 문학상인 ‘필립 K. 딕 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올해 후보작 6개 가운데 정 작가 작품이 유일한 번역서다. 소설집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 2023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21년 국내에서 〈그녀를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소설집이 지난해 영문판으로 번역되며 표제작을 〈너의 유토피아〉로 바꿨다. ‘그녀를 만나다’를 영어로 번역하면 주어가 없어서 어색했다. 고장 난 휴머노이드를 태우고 좀 더 나은 곳을 찾아 헤매는 스마트카(‘너의 유토피아’)와 식인병이 창궐한 지구를 벗어난 우주인들(‘여행의 끝’), 불치병을 앓는 거주자를 향해 애틋한 마음을 품는 엘리베이터(‘One More Kiss, Dear’)가 등장한다.

2021년 정 작가는 차별금지법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위해 오체투지에 참가했던 경험을 〈그녀를 만났다〉의 ‘작가의 말’에 썼다. 스님들의 오체투지 속도가 정말 빨라서 ‘소림사 스님들이 어째서 날아다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는 그가 차별금지법은 제정되지 않고 중대재해처벌법은 엉망이 되었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에 출간된 개정판 〈너의 유토피아〉에서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동성 부부 피부양자 인정 소송을 언급하며 ‘우리는 모두, 여전히, 다 같이, 싸우고 있다’라고 썼다. 정 작가에게 ‘끝나지 않는 싸움’에 대해 물었다.

필립 K. 딕 상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은 어떻게 들었나.

안톤 허 번역가가 주최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내게 전달해주었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고공농성 1주년 1박2일 희망텐트가 끝난 날이었다. 1박을 하지는 못했지만 집에 늦게 들어가 다음 날 (몸이 아파서 일찍) 일어날 수가 없어 11시쯤 일어나 핸드폰을 보는데 연락이 와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삭신이 쑤신다’ 했다.

소감을 들려달라.

감격했다. 한국 바깥의 SF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건 자신감을 주는 일이고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쓰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큰 안도감이 들었다. 역대 수상자들을 봤더니 휴고나 네뷸러 상처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에 주는 상은 아니지만 영문과에서 연구할 만한, 그런 작품들이 상을 많이 받았더라. 1983년부터 지금까지 번역작이 상을 받은 건 이토 사토시라는 일본 작가 한 명밖에 없다.

영미권에서 번역된 두 번째 작품집이다. 좋은 반응을 얻은 이유를 짐작한다면?

안톤 허 번역가가 〈저주토끼〉를 출간하고 내 작품 중 또 번역할 만한 게 뭐가 있나 둘러볼 때쯤 〈그녀를 만나다〉가 나왔다. 영미권보다 앞서 〈너의 유토피아〉와 〈여자들의 왕〉이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어로 반반씩 번역해 출간됐는데, 대륙 스페인과는 또 완전히 갈라져 있더라. 남미에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문학상이 없다. 오래 유지되고 잘 알려진 상이 영어권의 SF 문학상이다. 냉전시대 과학기술 경쟁을 하면서 SF 문학상이 생겨났다. 우주선을 발사하면 시청률이 많이 나오니 과학잡지와 SF 붐이 일었다. SF는 미국이 우세하다. 냉전의 유산인 셈이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 개정판(오른쪽)과 영문판. ⓒ래빗홀 제공

인상적인 해외 독자의 피드백이 있었나?

인도에서 와달라는 초청을 많이 받았다. 직접 갈 만한 상황이 아니라 작년 여름 즈음 온라인으로 강연을 많이 했다. 대부분 여성 독자였는데 다들 〈너의 유토피아〉에 실린 ‘여행의 끝’을 좋아했다. 소설 속에서 남자가 ‘남자는 나만 남고 여자는 너만 남았으니 우리가 인류를 다시 시작하자’고 했더니 여자가 남자를 먹어버린다. 이게 너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페미니즘 시각에서 생각해본 적은 없고 병증의 일부가 발현되는 걸로 생각했는데 페미니즘이라며 좋아하시더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했나.

남편이 수술을 받아 병원에 있거나, 데모를 하고 있어서 시상식이나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는 못 봤다. 그런데 너무 좋았다. 너무너무 좋았다. 지난해 10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하는 ‘우붓 작가와 독자 축제’에 갔는데 주최 측이 예정에 없던 오프닝 기자회견에 나를 황급히 앉혀놓고 한강 작가가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탔으니 글을 쓰고자 하는 아시아 여성들한테 한마디 해달라고 하더라. 아시아 여성으로서 최초라고 말해주는 게 기뻤다.

동료 소설가로서 독자와는 또 달랐을 것 같다.

〈작별하지 않는다〉부터 읽고 병원에 있을 때 〈소년이 온다〉를 보았다.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1차로 부결되고 2차 표결이 있을 때 읽으며 질질 울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이렇게 숨도 못 쉬게, 눈을 뗄 수 없게 쓸 수가 있나, 우주가 내려준 필력이 아니고선 어떻게 사람 심장을 이렇게 쥐어짤 수 있나 생각했다. 심장이 쥐어짜이면서도 이런 얘기를 글로 써준 게 너무 고마웠다. 울고 나서 한숨 돌리고 나니까 (탄핵 정국이 아니었다면) ‘한강 작가님을 팔아서 벌 수 있는 돈(외화)이 얼마였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 광주에서는 관련 투어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걸 세계로 팔면 하루에 100만 달러씩은 벌 수 있었을 텐데.

늘 집회 시위 현장에 있는데 그 경험이 작품에 반영되기도 하나? ‘그녀를 만나다’에는 변희수 하사의 이름이 나온다.

그렇게 서슴없이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의도적이기도 했다. 책이 나오기 직전에 돌아가셨는데 너무 충격이 커서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현대문학〉에 중편을 하나 냈는데 〈예언자〉라는 단행본으로 나올 거다. 거기에 시위 장면이 여러 번 들어간다. 이웃 나라가 침략을 해 점령당한 상태에서 교육이 망가지고 아이들의 삶이 파괴되는 걸 보며 중학교 교사가 시위를 하러 나간다. 또 내가 시위한 내용은 아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을 때 크림반도 바로 위 헤르손이라는 도시에 러시아 군인들이 시청을 점거한 일이 있었다. 러시아 군이 시청 공무원을 두들겨 패고 시장을 끌어냈다. 군사시설이 아니라 행정시설이기 때문에 점거할 권리가 없다고 저항하는 헤르손 사람들을 보며 작품에 반영하기도 했다.

〈그녀를 만나다〉 초판 ‘작가의 말’에서 유토피아를 네 가지로 구분한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의 견해를 인용하기도 했는데, 본인의 생각은?

인간은 유토피아에 알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데 유토피아는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각자 생각하는 유토피아도 너무 다르다. 이상향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인간 자체가 불완전해 그걸 유지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유토피아를 만들 수 없고 거기서 살 수도 없다. 다만 노력하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게 계속 데모를 하는 이유 같기도 한데, 회의가 들 때는 없는지 궁금하다.

상근 활동가였으면 많이 좌절했을 것 같다. 나는 그냥 현장에 한번 가는 처지고, 일단 그분들이 좋다. 전장연 집회에도 세월호 집회에도 굉장한 걸 이루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분들이 뭘 한다니까 머릿수라도 하나 보태러 가는 거다. 나는 어떤 의제에 대한 장기적 전망과 해결책, 이런 데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 목표를 세우는 건 당사자 분들이 하는 거고 나는 그냥 뒤에서 뭔가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들고 끌어야 하면 끌고 그런다. 한국비정규교수노조 활동도 마찬가지다. 퇴직금 소송의 경우도 국립대와 사립대의 상황이 또 다르다. 노조와 발 맞춰 같은 직군에 있는 사람에게 최대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하려고 노력 중이다.

강사로 일한 연세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는데.

2022년 4월에 소장을 넣어 2025년 1월8일에 1심 판결이 나왔다. (퇴직금이나 각종 수당에 관해) 정규직 교수와 같은 액수를 적용해달라는 게 아니고 같은 계산 방식을 적용해달라는 거다. 기간제 교사는 정규직 교사와 같은 방식에 맞추는데 대학 강사는 왜 그게 안 되느냐는 의미였다. 이번 판결에서 근로시간을 계산할 때 얼마나 일했느냐를 두고 강의 준비 시간 등을 고려해 강의 시간의 3배로 계산했다. 일주일에 15시간 이상이 되면 퇴직금을 요구할 근거가 된다고 판단했다. (법원이 그걸 받아들였지만) 소정 근로시간 1시간당 임금을 1시간 강의료 곱하기 3분의 1로 계산했다. 그게 부당하다는 것이고 강의 외 수반 업무에 대한 수당을 기각한 것도 강사에 대한 차별이라고 본다. ‘단시간 근로자이기 때문에 수당은 주지 않는다’에 승복을 하면 소송을 건 의미 자체가 없어서 항소했다.

1월22일 정보라 작가가 입은 옷에 ‘차별에 저항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시사IN 조남진

오래 일한 학교를 상대로 싸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그만둔 걸 몰랐던 학생들이 내가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고 하니 과 사무실에 와서 메일함에 선물을 놓고 갔다는데, 2021년 12월31일자로 그만둔 이후 학교에 한 번도 안 갔다. 그게 너무 미안하다. 강사 일을 할 때부터 이상한 게 되게 많았다. 이 사람들이 왜 나를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이것은 부당하고 이것은 비정규직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게 너무 좋다.

가까이 출간을 앞둔 작품이 있나?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싱가포르에 사는 대릴 코 작가의 〈미스트 바운드〉를 번역한 게 곧 나온다. 청소년 판타지 작품이다. 작가가 아시아 요괴 전설을 열심히 조사하고 잘 활용했다. 아시아 판타지인 것도 마음에 들고 할머니와 손녀의 모험인 점도 좋다. 번역을 하며 많이 배운다. 나도 이렇게 재밌는 걸 써보고 싶다거나 이런 식의 실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극이 많이 된다. 원래 지난해 12월31일에 마감을 했어야 하는 장편도 쓰고 있다. 4월에 필립 K. 딕 상 시상식에 참석한다. 그때 이걸(무지개색 띠) 가지고 갈 거다. 트럼프 대통령이 성별은 공식적으로 두 개밖에 없다고 했다던데,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무지개가 토해낸 것처럼 묶고 갈 거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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