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새로운 시대 열어간 문화적 실천가
어떤 사람이 자신이 떠나는 자리를 자신의 소리로 채울 수 있을까? 음악가가 아니라면. 그러니 자신의 곡으로 인사를 받는 그는 음악가 맞다. ‘저 평등의 땅에’로 알려진 작곡가 류형수가 봄을 알리는 날인 입춘, 지난 3일에 하늘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그를 ‘민중가요 작곡가’라고 알고 있다. 류형수는 1985년 대학에 들어가 노래 동아리 ‘메아리’ 활동을 하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그러자마자 작곡을 시작했고, 기타를 자기 몸처럼 쳤고, 새로운 문물인 신시사이저를 게임기처럼 가지고 놀았다. 특별히 음악교육을 받은 것도 아닌 갓 수험생 벗어난 이과생, 음대도 아니고 전기공학과 신입생이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류형수는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처음 듣는 노래도 바로 기타로 반주를 맞춰주고, 노래를 부르는 이가 박자를 절거나 음정을 놓치면 순간순간 박자를 맞춰주고 키를 맞춰주며 노래 못하는 사람도 마치 잘하는 것처럼 들리게 만들어 주는 능력자였다. 그러니까 그는 말로만 듣던 절대음감에 메트로놈 버금가는 박자 감각을 장착하고 태어난 특별한 사람, 소위 말하는 ‘천재’ 맞을 것이다.
그러나 류형수의 가장 놀라운 능력은 음악적 비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이었다. 귀를 열고 벗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마음,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허투루 여기지 않고 저마다의 사정을 깊이 새기고 품어 노래로 위로해주곤 했다. 부모님 곁을 떠나 대학에 들어갔던 해가 1985년, 폭력적인 시절, 야만적인 시대, 5공화국의 한복판이었다.
절대음감·‘메트로놈 박자감’ 지니고
프로그래밍·AI 탁월한 능력자지만
벗들에 공감하던 ‘열린 마음’ 놀라워
선배들이, 벗들이 끌려가고, 고문받고, 죽는 모습을 눈앞에서 맞닥뜨리던 시절. 학교는 전쟁터 같았고, 교문 앞에는 늘 최루탄이 자욱했으며, 거리에서는 수시로 가방을 열어보라며 검문이 일상이었다.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군사조직으로 편성되어 입학하자마자 군사교육을 받으러 문무대(육군학생군사학교) 먼저 가고, 학교 연병장에서 교련복 입고 매주 훈련도 받았으며, 학년이 바뀌면 전방에도 가야 했다.
독재의 시대, 청년들은 거리로 나섰고, 외쳤고, 싸웠다.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되었고, 노동현장의 가혹한 현실을 보게 되었고, 농민과 빈민, 여성들의 목소리가 틀어 막히는 상황 안에서 숨쉬기조차 힘들었을 때, 류형수는 그 모든 상황을 아파했고, 분노하며 같이 싸웠다. 그 분노는 노래가 되었다.
모든 미디어와 문화예술이 검열과 통제를 받던 시대에 노래로 위로하고, 노래로 응원하고, 노래로 풍자하고, 노래로 싸운다는 것은 얼마나 치열한 일이었는지. 노래는 바로 음반으로 알려질 수 없었고, 방송을 통해 널리 퍼질 수도 없었다. 그러나 류형수의 노래는 발표되고 한달이면 어느새 모두가 아는 곡이 되었다.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이하 노문연)의 음악분과 ‘새벽’에서 든든한 동료들인 음악활동가들과 만나면서 메아리에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뮤지션이었던 류형수는 작곡가로서 본격적으로 날개를 펼치게 되었다. 류형수는 대중들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속도보다 빠르면서도 깊고 넓게 세상을 음악으로 옮겨 해석해주었다.
‘노래 또한 투쟁의 도구’로 여겨졌던 시대에 새벽과 류형수의 작업은 ‘음악 자체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문화적 실천’이었고, 노문연을 통해 류형수는 ‘노동자’의 문화와 음악이 예술적 성취를 이루며 대중을 이끄는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의 귀와 마음에 넘치도록 들려주었다.
독재의 시대, 노래로 응원·풍자·투쟁
노문연서 작곡가로 본격 활동하며
노동자 문화의 예술적 성취 보여줘
세상 이롭게 한 ‘전방위 얼리어답터’
류형수가 음악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디스코 사운드에나 쓰이는 줄 알았던 신시사이저를 보자마자, 다른 음악전공자들이나 엔지니어들은 매뉴얼을 공부하며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난감해할 때, 이리저리 몇 번 눌러보더니 건반 악기 이상의 사운드 창작 도구로서의 가능성을 금방 간파해냈다. 그렇게 알아낸 가능성은 바로 ‘선언’이나 ‘철의 기지’에서 마치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웅장하고 풍성한 사운드로 울려 퍼졌다.
플로피 디스켓으로 컴퓨터를 부팅하던 ‘286’ 시기부터 1987년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그는 음악만큼이나 재미있고 창의적인 컴퓨터 분야에서 프로그래머로서의 ‘부캐’에 눈뜨더니 게임과 미디어,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첨단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뤄왔다.
프로그래머로서의 류형수나 작곡가로서의 류형수 모두 철학의 바탕은 같았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것’. 류형수는 자신의 곡을 누구나 부를 수 있도록 무상으로 세상에 풀어 놓았듯이 프로그램도 오픈 소스를 바탕으로 누구나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얼리 어답터’였다.
시대가 바뀌며 예전 문화운동과는 결이 다른 활동을 고민하는 동안 중년이 된 새벽 동료 가수 윤선애를 위해 곡 ‘낭만 아줌마’를 만들어주고, 중년이 되어 다시 광장에서 만난 친구들의 어설픈 합창을 위해 무대를 함께하고, 암과 맞서면서 작곡가로서 자신의 음반 ‘하루’를 만들고 콘서트도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류형수는 ‘잘하는 뛰어난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서툴러도 음악으로 소통하고 싶어하는 평범한 ‘벗’들과 함께 하고자 했다.
류형수, 우리에게 ‘평등의 땅’을 꿈꾸게 했던 아름다운 벗, 부디 안녕히….
이안/영화평론가
저는 영화평론가 이안, 메아리 동료이자 류형수가 출연한 다큐멘터리 <나의 노래:메아리> 프로듀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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