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한겨레 2025. 2. 12. 11: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15회
경북 포항시 자택 작업실에서 만난 정보라 작가. 포항/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정보라 작가는 싸운다. “많은 경우, 화가 나서 글을 쓴다”고 말한다. (단편선 ‘아무도 모를 것이다’에 수록된 작가의 말 중.) 그가 보고 느낀 부조리와 불의, 폭력과 억압은 SF, 호러, 환상문학을 넘나들며 이야기가 된다. 최근 ‘너의 유토피아’로 미국 필립 K.딕 상, ‘저주토끼’로 2023년 전미번역상,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른 작가. 그리고 자신의 전 일터이자 모교인 연세대를 상대로 제기한 퇴직금 및 주휴·연차휴가·노동절휴가 수당 청구소송에서 일부 승소해 약 3300여만원을 지급받은 정보라 작가 말이다.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문단 중심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정보라 작가는 아웃사이더다. 오랫동안 웹과 지면을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 내왔지만, ‘저주토끼’가 부커상 최종 후보로 오른 것이 ‘깜짝 소식’일 정도로 문단의 관심 밖에 있었다. 순문학의 전통적인 등단 방식 대신 디지털문학상 모바일 부문 우수상, 제1회 SF어워드 단편부문 우수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문단의 인정이나 대중의 주목 같은 것은 따라오거나 말거나 한결 같은 페이스로 매년 꾸준히 작품을 써내 약 수십 여 권의 책을 출간한 왕성한 창작자다.

하지만 그 자신의 시선과 태도, 작품과 세계와의 관계로 본다면 그는 인파이터다. 그것도 아주 집요하고도 날카로운 잽을 계속해서 날리는 스타일이다. 정보라 작가는 국가, 정부, 기업, 자본주의, 가부장제, 성별 이분법, 모든 체제와 권위와 정상성에 항거하는 이야기를 찾아낸다. 그리고 환상과 비현실을 뒤섞어 공포와 유머로 버무려낸 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곧 디스토피아임을, 그러나 그가 희구하는 세계엔 유토피아가 있음을 드러낸다. 장인의 기술을 탈취하고 파멸한 기업에 내려진 저주, 성관계 없이 임신해 아빠가 될 남자를 찾는 여자, 자신을 착취한 인간에 대한 여우의 복수, 인육을 먹는 전염병이 돈 세상,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해양 생물들의 입장, 고 변희수 하사에게 바치는 또 다를 수 있었던 미래 등.

정보라 작가가 2022년 8월31일 오전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재판에 앞서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기자회견에 참석해 입장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보라 작가의 글은 건조하고 단호하며 속도감 있다. 킥킥 웃다가도 종국엔 코끝이 매워지는 싸늘한 블랙유머로 가득한 그의 세계에는 ‘안온’, ‘무해’, ‘다정’처럼 미온적이고 뜨뜻미지근하며 뭉근한 키워드는 없다. 그는 팔뚝질을 할 지 언정, 차가운 현실에 대해 비관하지 않는다. 절대로. 그 투쟁적인 태도가 바로 희망이다.

정보라 작가의 비판적 시선, 무궁무진한 상상력, 러시아 및 동구권 지역 정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전공 지식, 수많은 민속 문학과 장르 문학을 읽어 온 열혈 독자로서의 면모, 펜을 든 이래 수많은 작품을 쉬지 않고 쏟아낸 이야기꾼으로서의 열정, 모든 것을 질투하지만, 가장 경애하는 건 에세이집 ‘아무튼 데모’를 비롯해 작가의 말에서 언급하는 세계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투쟁이다.

그는 다수의 언론 인터뷰에서 “취미가 데모”라고 밝힐 정도로 베테랑 운동가다. 이태원 참사희생자 추모를 위한 오체투지, 전장연 집회 및 지하철 선전전,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오체투지, 쌍용차 해고 노동자 복직 투쟁,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서명 운동과 농성,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투쟁과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투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지난 1월,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투쟁해 법적 다툼 끝에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은 것이다.

정보라 작가의 가방. 다양한 운동 구호가 적힌 배지들이 달려 있다. 래빗홀 제공

모든 예술 작품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당시의 세계와 관계하기에 필연적으로 정치적이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개념인 ‘앙가주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근현대에 이르러 많은 작가들이 참여 문학을 개진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디쯤에 있는가? 작가들은 대개 자신을 세계와 작품 사이 모호한 곳에 위치시킨다. 아예 사회 이슈에 대한 공적인 발언은 삼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작품을 지키기 위해서일 수도, 지나친 노출을 꺼려 하는 작가들의 성향 탓일 수도 있다. 그것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와 관객들은 부조리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문화예술인 연대 서명 등의 리스트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려 애쓰고, 찾아 내고서는 기뻐한다. 그만큼 그들의 정치적 발언을, 영향력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정보라 작가는 자신의 작품 뒤에 서지 않는다. 작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발화하는 행위를 넘어, 실존하는 자신의 육체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뜨거운 여름에나 추운 겨울에나 맨 바닥에서 오체투지를 하며 노동자들의, 장애인들의, 유가족들의,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해 몸으로 싸운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창작하고, 번역하고, 강의하고, 암 투병 중인 가족의 간병을 하면서도, 그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끊임없이 연대하며 희망을 모색했다. 거의 분신술을 쓰는 듯한 그의 시간 활용법에는 순수한 경탄이 들 지경이다.

소속 집단의 외면 끝에 외롭게 자살한 트랜스여성, 고 변희수 하사의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한 ‘그녀를 만나다’를 읽는 경험은 각별했다. 과거 군인이었다는 설정을 비롯해 이런저런 단서를 보며 설마, 하다가 마지막에 그가 변희수 하사인 것이 드러나자 결국엔 코가 찡해졌다. 변희수 하사에게 부여된 또 다른 미래가, 그녀가 살아남아 행복해진 그 어디쯤의 평행 세계가, 사무치게 소중하게 느껴졌다. 웃음기 싹 가시는 블랙유머를 구사하다가 종종 이토록 찬란한 무지갯빛 희망을 심어놓는 그를, 작가이자 동료 시민으로서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국판 ‘저주토끼’ 책을 들고 있는 정보라 작가. 포항/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정보라 작가가 전 일터이자 모교인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승소한 소식을 듣고 은밀한 쾌감을 느꼈다. 연세대 출신의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탔을 때 그토록 자랑스러워 한 연세대가, 졸업생이자 10여 년 비정규직 교수로 일한 정보라 작가에게 고작 퇴직금과 주휴 및 연차 수당 몇 푼을 안 주려고,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그토록 애쓰다 체면을 구겼을 때. 정보라 작가는 앞으로도 자신에게 일을 줄 수 있는 기관인 대학의 눈치를 살피기보단 자신의 권리를 찾길 택했다.

기나긴 소송 과정 중 정보라 작가가 가장 유력한 국제 도서상 수상 후보가 됐다. 정보라 작가가 어떤 국제적인 상을 받아오더라도 연세대학교는 그녀가 졸업생인 것을 자랑스러워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조직들은 한 인간을 쉽게 짓밟고 오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할까? 세상엔 정보라 같은 뾰족한 존재들이 있고, 당신들에게 엿을 먹일 것임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특이점을 앞두고 노동이라는 개념과 계급의 문제, 모든 것들이 재정립될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다. 근미래를 엿보고 싶다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정보라의 SF를 보라.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 나는 동료 시민들이 사회적 안전망 속에서 부디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길 바란다. 투쟁.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질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러운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지요. 이예지 디렉터가 <GQ>, <아레나>, <씨네21> 등 4개 매체를 거치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의 면면 중에 가장 열렬히 질투했던 구석을 파고든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은 격주 수요일 낮 12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