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은 왜 왕릉을 찾았을까…"백성 고충 듣고 정통성 강조"

김예나 2025. 2. 1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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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명릉에 나아가 전배(展拜·궁궐, 종묘, 능침 등에 참배함)와 봉심(奉審·임금의 명으로 능이나 묘를 보살피던 일)하고, 익릉과 경릉에도 나아가 전배와 봉심을 한 다음 순회묘를 들러서 재실로 돌아왔다."

보고서는 조선시대 국왕들이 능(陵), 원(園), 묘(墓) 등 왕릉군을 방문한 사례를 정리했다.

책임 연구자인 강제훈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천명을 받은 국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례 공간은 종묘였으나, 17세기를 지나면서 왕릉의 위상이 전환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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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시대 능행 연구·분석한 보고서 발간
역대 국왕, 왕릉군 211회 방문…17세기 들어 종묘보다 왕릉 더 찾아
고양 서오릉 내 명릉으로 향하는 길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임금이 명릉에 나아가 전배(展拜·궁궐, 종묘, 능침 등에 참배함)와 봉심(奉審·임금의 명으로 능이나 묘를 보살피던 일)하고, 익릉과 경릉에도 나아가 전배와 봉심을 한 다음 순회묘를 들러서 재실로 돌아왔다."

1760년 음력 3월 25일 영조(재위 1724∼1776)는 고양 서오릉으로 향했다.

서오릉은 서쪽에 있는 5기의 능으로, 선대 왕과 왕비 무덤이 모인 왕릉군이었다.

영조는 먼저 부친인 숙종(재위 1674∼1720)과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가 묻힌 명릉을 찾아 예를 갖춰 참배했다.

고양 서오릉 내 명릉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후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묻힌 익릉, 세조(재위 1455∼1468)의 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1438∼1457)와 소혜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을 잇달아 찾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사흘간 능행(陵幸)을 이어가면서 지방 수령에게 음식을 내리고, 중죄인을 제외한 고양 지역의 죄수를 모두 석방하라고 명했다.

52년간 재위한 영조는 서오릉을 총 24차례 다녀갔다고 전한다. 선대 왕과 왕비 무덤에 예를 표하고자 왕이 직접 행차하는 능행은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12일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가 펴낸 '조선시대 능행 심화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능행은 '국왕의 정치적 정통성과 통치자로서 대민 친밀성을 강조'하는 행위로 평가된다.

고양 서오릉 내 익릉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보고서는 조선시대 국왕들이 능(陵), 원(園), 묘(墓) 등 왕릉군을 방문한 사례를 정리했다. 원과 묘는 왕릉보다는 낮은 단계의 무덤을 일컫는다.

분석 결과 역대 국왕들이 왕릉군으로 능행에 나선 사례는 총 211회였다.

한번 능행에 나서면 여러 곳의 능, 원, 묘를 찾기도 했는데 역대 왕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구리 동구릉(89회)이며, 그다음은 서오릉(63회)으로 집계됐다.

왕릉으로 향하는 여정은 왕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큰일이었다.

보고서는 "능행은 궁궐 밖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국왕의 행위"라며 "국왕 개인으로서는 도성 밖으로 행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라고 짚었다.

고양 서오릉 내 경릉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면서 "국왕들은 능행에 맞춰 사냥, 진법 훈련 등의 군사 활동을 하거나 백성들에게 농사의 작황과 그들이 겪는 고충을 묻는 대민 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왕릉 방문이 늘어난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책임 연구자인 강제훈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천명을 받은 국왕의 지위를 상징하는 의례 공간은 종묘였으나, 17세기를 지나면서 왕릉의 위상이 전환됐다"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종묘는 야간에 의례가 진행되고 제한된 인원이 현장에 참여하는 반면, 왕릉은 주간에 국왕이 이동하고 의례를 한다"며 "국왕의 존재를 노출할 기회"가 됐다고 봤다.

조선시대 국왕별 구리 동구릉 능·원·묘 행행 횟수 연구 보고서 캡처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보고서는 왕릉 관리와 운영 상황을 기록한 능지(陵誌) 등 옛 문헌을 바탕으로 시기별 능행 추이, 세부 경로, 군병 배치 및 규모 등을 분석한 내용을 실었다.

또 지리정보시스템(GIS)을 활용해 대표 능행 사례 4건을 표현한 지도도 담았다.

연구를 진행한 고려대 산학협력단은 보고서에서 "향후 능을 운영하고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경제적 기반과 운영과 관련한 내용을 추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조선 왕릉의 특징을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고려 왕릉, 나아가 명(明) 황릉과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고 후속 연구를 제언했다.

궁능유적본부는 조선왕릉 행사 개발, 전시 개편 등에 연구 성과를 반영할 계획이다.

연구를 통해 밝혀낸 영조의 서오릉 능행 세부 경로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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