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만든 사람… 나를 믿어준 감독님의 배우가 되고 싶어졌다

신정선 기자 2025. 2. 12.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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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 한 인연] [2]
‘오징어 게임’ 알리 역 배우 아누팜과 황동혁 감독
서울 성북구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지난 6일 만난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는 “황동혁 감독님이 저를 배우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다”며 “저도 한국에 있는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37)는 “제 인생은 2021년 9월 17일 오후 4시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첫 시즌이 공개된 그날, 선량한 파키스탄인 노동자 알리 압둘로 출연한 아누팜은 글로벌 스타가 됐다. 무명 배우에서 스타로 부상한 지 4년, 아누팜은 지난 6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 행사인 ‘홈커밍데이’ 사회자로 손님을 맞았다. 인도 뉴델리 출신인 그는 한예종 연극원 연기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지난해 2월 졸업했다. 아누팜은 본지 인터뷰에서 “초기엔 저의 어눌한 한국어 때문에 선후배들이 많이 힘들었을 텐데 이해해 주고 가르쳐 줘서 너무나 고맙다”고 말했다.

스물두 살 인도 청년 아누팜이 낯선 나라 한국으로 유학 온 것은 2010년이었다. 무대만 눈에 보이던 배우 지망생 아누팜에게 한 친구가 “한국에 이런 게 있대”라며 모집 공고를 알려줬다. 한예종의 외국인 인재 장학 프로그램이었다. 뽑히기만 하면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다. 아직 K컬처가 세계에 알려지기 전, 아누팜은 “연기를 제대로 배울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는 생각에 ‘삼성, 엘지, 현다이(현대)의 나라’로만 알던 한국의 한예종에 원서를 냈다.

결과는 합격. 아누팜은 “2010년 10월 22일 낮 12시 반, 공항에 내려 처음 한국 땅을 밟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떠나던 날 아침엔 그를 배웅하겠다며 동네 친구에 일가친척까지 나서는 바람에 택시 7대를 대절했다.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나선 유학길, 한국에 도착해 파키스탄인 선배를 따라 처음으로 밥과 생선, 김치를 먹었다. 아누팜은 “그날 식사는 메뉴만 기억난다”고 했다. 먹으면서 계속 눈물이 나서 맛은 알 수 없었다.

낯설고 물선 곳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 어학연수 석 달간은 날마다 눈물이었다. “왜 돌아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누팜은 “제가 중간에 그만두면 앞으로 인도 학생을 안 뽑아줄까 걱정돼 어떻게든 버텼다”고 말했다. 버티다 보니 기회가 왔다.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2014)에서 단역인 스리랑카 노동자로 데뷔했다. 이후 외국인 청부 살인 업자(’아수라‘), 인도 남자(’럭키‘), 네팔 식당 사장(’심장박동조작극‘), 우르크 인부(’태양의 후예‘) 등을 거쳤다. 대사 한두 마디가 전부인 비슷한 단역이었다. 그럼에도 아누팜은 “한 번도 제 역할이 스테레오 타입(정형화된 역할)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며 “3초가 언제 3시간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무리 짧아도 자부심을 갖고 연기했다”고 말했다.

지난 2022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 시사회장에서 만난 황동혁(왼쪽) 감독과 아누팜. /아누팜 트리파티 제공

마침내 3초가 3시간 이상이 될 행운의 순간이 찾아왔다. 2020년 1월 ‘오징어 게임’ 오디션이었다. 오디션용 영상을 보내고, 조감독 오디션을 보고, 최종 3단계에서 감독 오디션에 갔다. 그때 황동혁 감독을 처음 만났다. 아누팜은 “황 감독님을 처음 봤을 땐 저처럼 놀기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니 저와 달리 굉장히 철저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황 감독의 오디션 주문을 너끈히 소화해 낸 아누팜은 알리 역을 따냈다. 그 이후 황 감독은 누팜에게 “내 인생을 만든 사람(The man who made my life)”이 됐다. “황 감독님 덕분에 세계가 저를 알 수 있었잖아요. 한예종이 제게 새 삶의 기회를 줬다면 황 감독님은 배우로 다시 태어나게 해준 거죠.” 황 감독은 후에 공개된 비하인드 영상에서 “알리 역을 누가 할지 걱정이 많았는데 아누팜이 혜성처럼 나타났다”며 “한국말도 잘할뿐더러 제대로 된 감정 연기까지 할 수 있는 유학생이라니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아누팜은 촬영 현장에서 황 감독을 볼 때면 애틋한 느낌이 드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중요한 장면 촬영 때 가까이 다가와 ‘아누팜, 여기선 이러저러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자세히 가르쳐 주면 하염없이 ‘감독님의 배우’가 되고 싶어졌다. 어느 날 촬영이 끝나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아누팜, 진짜 잘했어. 진짜 좋았어”라는 황 감독의 칭찬을 듣고 으쓱해지기도 했다. “부모님은 제 삶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셨고, 황 감독님은 연기자로서 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해주셨어요.”

‘오징어 게임’에서 유독 알리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것은 살가운 웃음과 장난기가 넘치는 배우 아누팜의 본성이 투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처음 만난 누구라도 곧바로 친구로 만들어버리는 붙임성을 가진 그는 “오랜만에 제 얘기를 하니까 눈물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히다가도 어느새 그랬냐는 듯 본인이 작사·작곡한 노래를 미처 청하기도 전에 2절까지 불러줄 정도로 흥도 넘쳤다.

앞으로도 배우의 여정을 계속할 계획이다. 지난해 넷플릭스인디아를 통해 공개된 범죄 스릴러 ‘IC 814: 칸다하르 납치’에 스파이로 출연했으며, 국내 지상파 드라마와 영화 한 편도 대기 중이다. 아누팜은 “이전에는 연기가 즐거운 놀이였지만 이제는 놀이인 동시에 책임인 것 같다”며 “한국에 사는 외국인 친구 중에 예술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데 제가 어떻게든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너 믿고 있는 거 알지?” 아누팜이 감동한 황동혁의 말

배우 아누팜 트리파티는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을 떠올릴 때마다 한마디가 귀에 쟁쟁하다. 촬영장에서 그의 연기가 막히는 듯할 때마다 황 감독이 다가와서 건네던 “나, 너 믿고 있는 거 알지?”라는 말이었다. 아누팜은 본지 인터뷰에서 “저를 선택해준 감독님이 절 믿어준다는 사실에 큰 안정감을 느꼈다”며 “하다가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이 의지가 되면서 뭐든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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