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고수와 하수

김재원 동화작가 2025. 2. 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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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동화작가

바둑에 ‘수읽기’라는 용어가 있다. 머릿속에서 몇 수를 예상해 보고 가장 좋은 곳에 돌을 놓는다는 뜻이다. 고수는 수읽기를 잘하기 때문에 몇십 수를 내다보고 착점하지만 하수는 아무 생각 없이 덜컥 두다가 궁지에 몰리곤 한다.

고수는 돌 하나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반면에 하수는 대마의 생사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순식간에 비명횡사를 당하기도 한다.

고수는 반드시 수읽기를 한 뒤에 돌을 놓지만 하수는 지레 짐작으로 두다가 곤경에 빠지고 나면 한 수 물러달라고 간청한다. 고수가 아량으로 들어주면 모를까 안 들어주면 그만이다. 이미 돌들이 잔뜩 놓여있으니 한 수 물러준다고 쳐도 전체 판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니 다음 수를 착점할 때는 섣불리 놓지 말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놓아야 수세에 몰리지 않는다.

수읽기와 통하는 사자성어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 미리 앞을 내다본다는 말이다.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는 결과를 예상해 봐야 한다. 뒤탈이 없을지 충분히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해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덜컥 판단을 내렸다가 나중에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작금의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실언을 내뱉거나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바람에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서민들의 생활이 피폐해졌으니 하수의 덜컥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릴 때 방학을 하면 천방지축으로 싸돌아 다니다가 개학을 사나흘 앞두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방학 숙제와 일기가 손도 대지 않은 채 잔뜩 밀려 있었다. 그때부터 정신 없이 달라붙어 개학날 아침까지 했지만 결국 다 끝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한 일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온다.

어디 방학 숙제뿐일까? 평소에는 빈둥빈둥 놀다가 시험을 며칠 앞두고서야 똥줄이 타도록 벼락치기 공부를 했다. 그런 요행수가 미리미리 착실하게 공부한 모범생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친한 친구가 전교 1등이었는데 책상에 박힌 못과 같았다. 화장실에 갈 때 말고는 항상 책을 읽었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지독하게 읽었다. 그러니 언제나 성적이 좋을 수밖에.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농사조차 최소한 몇 달은 앞을 내다보아야 한다. 배추를 11월 말에 수확하는데 딱 당해서 심으면 배추가 영글겠는가? 호박구덩이는 적어도 한 달 전에 파놓아야 거름이 숙성되어 호박이 잘 큰다. 다른 모종도 마찬가지다. 밭을 갈아놓고 거름을 뿌린 뒤에 2주일은 지난 뒤에 심어야 탈 없이 자란다. 무슨 일이든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성급하게 밀어붙이면 졸속이라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어른이 된 나는 어린 시절의 벼락치기 병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다이어리를 쓴다. 코앞에 닥친 뒤에야 허둥대지 않도록 앞으로 할 일을 적어놓고 미리 대비한다. 머릿속에 든 것은 휘발성이 강해 자신도 모르게 날아가 버리지만 종이에 적어둔 것은 찢어버리지 않는 한 오래 남는다. 다이어리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준비하니 똥줄이 탈 일도 없고 느긋하게 해낼 수 있어서 편하다.

이제 우수가 며칠 남지 않았다. 아무리 추운 겨울도 물러가기 마련이다. 봄과 여름에 할 일을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유경백별우신지(柳經百別又新枝)’라는 말이 있다. ‘버드나무는 가지가 백 번을 꺾여도 봄이 되면 새 가지를 내민다’는 뜻이다. 버드나무 뿌리는 깊은 땅속에서도 봄이 올 줄을 내다보고 있다. 겨울이 언제까지나 계속된다면 새 가지를 내밀 까닭이 없다. 버드나무는 나이테 다이어리에 봄이 언제쯤 올지 기록해 놓았다. 봄이 완연해지기 전에 버들강아지를 터뜨려야 다른 나무보다 봄을 빨리 맞이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겨울이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초록잎과 줄기를 마음껏 뻗던 여름날을 돌이켜 보면 한때의 시련은 너끈히 참아낼 수 있으리라. 시국이 어렵지만 막 터지기 시작한 버들강아지를 보며 새로운 희망을 품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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