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안의 시한폭탄 된 ‘보조배터리’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기내 보조배터리 화재 건수 매년 증가 추세
(시사저널=정락인 탐사저널 사건전문기자)
하마터면 무안국제공항의 제주항공 사고에 이은 또 하나의 대형 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1월28일 오후 10시25분쯤 김해국제공항 계류장에서 홍콩행 에어부산 항공기 BX391편이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여객기 수화물 선반에서 연기가 나더니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승무원이 긴급하게 기내용 소화기를 들고 선반 쪽으로 향했지만 불길이 빠르게 확산됐다.
기내에 연기가 차면서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불은 항공유가 저장된 날개 부분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승무원은 소화기를 사용하는 대신 승객들 대피가 급하다고 판단하고 탑승객들을 탈출시키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승무원들의 빠른 대처로 탑승자 176명(승객 169명, 승무원 6명, 정비사 1명) 전원은 무사히 기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화재는 공항소방대에 의해 발생 1시간16분 만인 오후 11시31분 완전히 진압됐다.
보조배터리 화재, 2020년 이후 총 13건
이번 화재의 최초 발화는 기내 선반인 것으로 파악됐다. 화재를 최초 목격한 승무원과 승객들은 뒤쪽 좌측 선반에서 발화됐거나 연기가 시작됐다고 증언했다. 한 승객은 "기내 수하물을 두는 선반 짐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난 후 조금 있다가 연기가 났고, 선반에서 불똥이 떨어졌다"고 진술했다. 이에 따라 승객이 선반에 올려놓은 보조배터리나 전자기기에서 발화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배터리가 충격이나 압력을 받아 불이 났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전자기기의 배터리는 주로 리튬이온을 사용해 압력이나 충격에 의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12월12일에도 같은 항공사의 여객기에서 보조배터리 발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났었다. 당시 부산 김해공항에서 이륙을 위해 이동 중이던 에어부산 BX142편 여객기 안에서 갑자기 연기가 났는데, 승객이 들고 있던 휴대전화 보조배터리에서 비롯됐다.
객실 승무원이 기내 소화기로 곧바로 연기를 진압했지만 보조배터리를 들고 있던 승객 한 명은 화상을 입었다. 이후 해당 승객은 SNS에 당시 상황을 자세히 밝혔다. 그에 따르면 항공기에 탑승한 후 휴대전화에 보조배터리를 연결하고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사람들의 고함이 들려 깨어보니 허벅지에 올려둔 휴대전화와 보조배터리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는데, 그 순간 불이 붙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그는 보조배터리를 던지듯이 떨어뜨렸고, 옆에 있는 남성 승객이 신발로 끄려 했지만 불길이 좀 더 크게 일어나자 승무원이 소화기로 불을 껐다는 것이다.
항공사들, 기내 화재 위험 방지 대책 강화
해당 승객은 손과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고, 승무원과 김해공항 소방구조대가 응급처치를 한 후 병원으로 이송했다. 항공기는 활주로에서 방향을 돌려 다시 탑승 게이트로 돌아왔고, 에어부산은 모든 승객을 내리게 한 후 대체편을 투입해 수습했다. 그로부터 40여 일 만에 비슷한 사고가 또다시 발생하면서 항공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언제든지 같은 사고가 재발할 수 있어서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이연희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기준 국적기 기내 보조배터리 화재 건수는 2020년 이후 총 13건으로 집계됐다. 연도별로는 2020년 2건, 2023년 6건, 2024년 8월까지 5건으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 연방항공청(FAA)에 따르면 2015년 이후 지난해까지 미국 항공편에서 발생한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 사고는 약 5배(388%) 늘어났다. 이처럼 보조배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다.
현재 보조배터리 등 리튬배터리는 사람이나 항공기에 해를 가할 수 있는 '항공 위험물'로 분류된다. 위험성이 적은 항공 위험물의 경우 소량에 한해 기내 휴대하거나 위탁수하물로 보낼 수 있다. 현행 항공사 수하물 규정에 따라 카메라나 휴대전화, 노트북 등에 사용되는 리튬이온 배터리는 용량이 160와트시(Wh) 이상일 경우 기내 반입이나 수하물로 부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160Wh 미만인 보조배터리는 기내 반입만 가능하다.
항공 위험물 운송기준에 따르면 리튬 함량 2g 이하인 보조배터리는 용량 100Wh 이하인 경우 1인당 5개까지 객실 반입이 가능하다. 노트북·태블릿PC·전자담배 등 전자기기도 휴대할 수 있다. 수하물로 부칠 경우 인력이 기내에서 화물칸으로 접근할 방법이 없기에 화재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보조배터리의 기내 반입이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발열 등 이상 현상 발생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리튬이온 보조배터리의 경우 한번 불이 붙으면 쉽게 꺼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재질의 보조배터리 기내 반입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럴 경우 전동 휠체어나 심장박동기 등 반드시 의료용 보조배터리를 갖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은 항공기를 이용하는 데 제약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기내 반입 전면금지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차선책으로 기내 승무원이 따로 보관하는 등의 방법이 논의되고 있다. 항공사에서는 항공기 이륙 전에 보조배터리는 승객이 몸에 지니도록 안내하고 있다. 물론 강제 사항이 아니어서 승객들의 판단에 따라 몸에 지니거나 선반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이번 화재를 계기로 좀 더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자, 에어부산이 가장 먼저 관련 대책을 내놓았다. 에어부산은 '기내 화재 위험 최소화 정책'을 수립해 2월7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휴대 수하물 내 보조배터리 소지 유무를 사전 확인하는 절차가 핵심이다. 에어부산은 탑승구에서 휴대 수하물 내 배터리 소지 유무를 사전 확인하고, 기내에서는 탑승구에서 확인을 완료한 수하물만 선반에 보관할 수 있도록 통제를 강화했다.
예약·발권 및 탑승수속 단계에서 기존 안내에 더해 보조배터리 기내 선반 탑재 금지에 대한 동의 절차를 시행하고, 출발 1일 전에 예약 고객 대상 별도의 안내 문자를 발송한다. 탑승구에서 직원들이 승객들에게 구두로 리튬이온 배터리가 들어있지 않은지 확인한 뒤 확인된 수화물에 태그(TAG) 등 별도의 표식을 부착한다. 기내에는 이 표식이 있는 수화물만 선반에 보관할 수 있다. 사실상 보조배터리를 선반에 올려놓는 것을 금지하고, 승객이 소지하는 것을 의무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선은 일부 노선에서 시범운영을 거친 후 전 노선으로 확대 운영할 계획이다.
기내 안내 방송도 보완했다. 기존에는 "휴대전화와 보조배터리는 손님이 직접 소지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문구로 2차례 실시했으나, 이를 확대해 "보조배터리·전자담배를 포함한 전자기기는 선반에 보관할 경우 화재 위험이 높으니 반드시 소지하시기 바랍니다"로 변경해 3차례 방송으로 늘렸다. 기내 화재 발생 시 신속한 초기 대응과 효과적인 화재 진압을 위해 객실승무원 훈련도 대폭 강화한다. 아울러 배터리 화재 발생 시 열폭주와 폭발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장비도 구매해 항공기에 자체 구비할 예정이다.
에어부산 관계자는 "보조배터리 소지를 전면 금지할 수 없는 현실적 제약을 감안해 탑승객 스스로 점검을 유도하고, 배터리의 이상 현상이나 화재 발생 시 신속한 초기 대응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에어부산을 시작으로 다른 항공사들도 비슷한 대책 수립에 나설 전망이다.
화재 원인 규명 후 후속 대책 내놓을 듯
정부는 화재 원인을 규명한 후 후속 대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국토교통부는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와 프랑스 사고조사당국(BEA),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경찰 과학수사대, 소방으로 합동조사팀을 꾸리고 현장감식을 진행했다. 이 외에도 에어부산 관계자와 목격자 진술을 받고 폐쇄회로(CC)TV 영상과 블랙박스를 분석하는 등 초기 조사를 진행 중이다. 다만 화재 원인으로 보조배터리가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지만 사고 조사 완료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사고조사위는 "화재 원인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초기 조사를 진행 중이다. 증거물에 대한 감식 결과는 향후 사고 조사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공개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항공 업계에서는 만약 이번 화재 원인이 보조배터리로 밝혀진다면 향후 배터리 휴대·사용과 관련된 항공 제반 규정의 대폭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다.
■보조배터리 과충전도 폭발 위험 키워
휴대전화는 현대인의 필수품이다. 장기간 여행이나 출장을 갈 경우에는 보조배터리가 있어야 휴대전화 사용에 지장이 없다. 하루종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보조배터리는 필수 휴대품이다.
휴대전화와 노트북 등 전자기기에 들어가는 리튬이온 배터리는 한번 불이 나면 순식간에 온도가 치솟아 피해가 커질 수 있다. 보조배터리의 경우에는 외부 충격에 취약해 떨어트리면 그 충격으로 내부에 있는 분리막이 손상돼 폭발하거나 발화할 수 있다. 과열이나 배터리 자체 결함, 과충전도 배터리 화재 원인 중 하나다.
지난해 9월 베트남에서는 충전 중이던 휴대전화 배터리가 폭발해 12세 소년이 화상을 입고 왼쪽 손을 절단했다. 충전이 완료됐는데도 전원을 분리하지 않고 사용하면서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보조배터리의 과충전을 막기 위해서는 80% 정도만 충전하거나, 충전이 완료되면 전원과 분리하는 것이 좋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눈에 보이고 손이 닿는 곳에 놓고 관리해야 한다.
어린이와 반려견이 있는 곳에서도 보조배터리 관리에 더욱 신경써야 한다. 지난해 5월 미국에서는 반려견이 휴대전화 보조배터리를 물어뜯어 화재가 나기도 했다. 충전 장소도 햇빛이 들거나 열이 많이 방출되는 곳, 베개·침대·소파 등 가연물이 많은 곳 등은 피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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