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가자 점령”…거래적 사고와 팽창주의 결합된 ‘예고된 재앙’
실제 이행 여부는 미지수…美 내부도 실현 가능성 지적하며 ‘협상용’ 분석
(시사저널=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1961년 출범한 미국국제개발처(USAID)는 냉전기 미국의 대외 원조의 상징이었다. 당시 미국은 전략적으로 중요 지역 국가들을 개발 원조라는 카드로 관리했는데, 이를 주도하던 곳이 USAID다. 대한민국 같은 당시 저개발 국가들이 경제 성장을 이루고 확실한 자유진영의 국가가 돼야 공산권의 영향력 확산이 차단된다고 미국은 판단했다. 냉전 이후에도 USAID는 계속 저개발 국가에 보건 지원, 인도적 지원을 주로 하고 있으며 지금은 직원 1만 명에 약 400억 달러(58조원)의 연간 예산을 사용하고 있다.
USAID는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1983년까지 우리나라도 USAID 지원을 받아 주요 대도시의 상·하수도, 발전소, 시멘트 공장, 나일론 공장 등을 지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도 USAID의 차관 600만 달러로 시작됐다. USAID는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한 아파트 건설용 차관도 제공했는데 AID 차관 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나중에 모두 금싸라기 땅이 됐다. 영동 AID 차관 아파트는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힐스테이트로, 반포 AID 차관 아파트는 래미안트리니원으로, 해운대 AID 주공 아파트는 해운대 힐스테이트위브로 탈바꿈했다.
우리나라 사례만 놓고 보면 USAID는 성공적인 성과의 씨앗을 뿌린 기관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평가는 박하기만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1월20일 취임하자마자 미국의 대외개발 원조를 90일간 동결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행정부에서) 오랫동안 일어났던 낭비를 신속하게 조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급기야 현지시간 2월3일 워싱턴DC에 있는 USAID 본부 건물을 폐쇄했다. 연이어 2월4일 트럼프는 USAID의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할 만한 곳에 대해 강경하고도 일방적인 입장을 쏟아냈다. 바로 가자지구 점령 발언이었다.
가자지구의 인도적 참상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이다. 1월19일 휴전이 개시됐지만 오히려 그 이후 가자지구 사망자 수는 늘어나고 있다. 파괴된 건물 더미에서 그동안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은 지난해 11월 가자지구 사망자 수를 전후 6개월 동안 8119명으로 확인했고, 가자지구 보건 당국은 지난해 10월 사망자가 이미 4만33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발표했다. 휴전 기간 동안 얼마나 더 많은 시신이 확인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유엔 홈페이지에는 가자지구에 건물 잔해가 5000만 톤 쌓여 있고, 이를 치우는 데는 21년이 걸리며 그 비용은 12억 달러(약 1조7200억원)가 소요될 것이라는 평가도 소개되어 있다.
이런 곳을 트럼프 대통령은 점령하고 소유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 스스로 가자지구를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곳(hellhole)'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과거의 미국 같았으면 USAID를 통해 복구를 지원하고 미국의 영향권 아래 두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개했을 텐데 트럼프는 국제사회가 전혀 예상치 않은 구상을 내놓은 것이다. 이는 트럼프 시대 대외관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날 '거래적 사고방식'과 '신팽창주의'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정상외교는 현재 중동을 상대로 펼쳐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월4일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를 만났고, 11일에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을 만난다. 가자 전쟁이 종식돼야 트럼프 1기 당시 추진했던 아브라함 협정의 완성과 트럼프식 중동 평화협상이 마무리되는데 트럼프는 우선 이스라엘 설득에 공을 들이고 있는 모양새다. 아브라함 협정은 트럼프 1기 당시인 2020년 이스라엘과 UAE·바레인·모로코가 관계 정상화를 이루어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2023년 가자 전쟁 발발 이후에 사우디아라비아가 협상 중단을 선언한 상태다.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美 대외정책 기조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유명했던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협조부터 이끌어내기 위해 이스라엘을 한껏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우파 연정은 팔레스타인 합병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을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트럼프는 가자지구 점령 발언과 함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요르단이나 이집트 등으로 이주시키는 방안도 거침없이 밝혔다. 이제 다음 수순은 팔레스타인 주민 강제 이주 구상을 반대하고 있는 요르단과 아랍권 정상 달래기 혹은 목조르기다. 2월11일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과의 회담 결과가 주목되는 이유다. 요르단에는 어떠한 군사·경제적 지원을 주고, 그다음 큰 산인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어떠한 제안을 할지 그리고 그들의 협조를 끌어낼 수 있을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가자지구 점령 발언은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 획득 구상에 이어 트럼프식 팽창주의를 보여주고 있는 단면이다. 파나마 운하 획득을 통해 중국의 미주 해상교통로를 봉쇄하고, 그린란드 매입을 통해 북극항로와 희토류 전쟁에서 중·러를 기선 제압하겠다는 구상이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 점령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 협정 완성과 가자지구 점령에 성공한다면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강화되고 이란의 힘은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중국과 러시아, 이란을 잡을 포석이 외교적 협상과 전술이 아닌 물리적인 신팽창주의로 분출하는 양상이다. 자유주의 패권을 추구하되 물리적 지배가 아닌 강력한 영향력 행사를 기본으로 하는 미국 대외정책의 기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가자지구 점령 구상이 실제 이행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강제 이주가 수반되어야 할 트럼프의 구상은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도 규정되고, 세계주거회의(Habitat)가 지속 강조하는 주거권을 원천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토 침략의 방식으로 구상이 이행된다면 국제형사법상 침략 범죄를 구성할 수도 있다. 트럼프는 가자지구를 지중해 휴양지 리비에라처럼 만들겠다고 했지만, 가자지구는 현재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에 가깝다. 첫 삽을 뜬다고 해도 가자지구가 '리비에라'가 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는 기사가 줄을 잇고 있으며 공화당 의원들도 협상용이 아닌가 하고 조심스러운 반응들을 보이고 있다. 미국 밖에서 보면 오히려 USAID를 다시 살려 재건 지원을 하는 것이 미국의 국격에 어울리는 일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트럼프와 지지자들만 좋아하고 전 세계는 우려하고 반대하는 일들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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