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양심이 ‘공평’을 ‘공정’으로 나아가게 한다”
인생 2모작에서 ‘양심’이란 단어 꺼내든 이유
(시사저널=정시우 칼럼니스트)
1990년대 말, 방송인 이경규가 진행한 《양심 냉장고》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를 찾아내 냉장고를 주는 예능이었다. 우리 사회의 숨은 양심을 찾아낸 이 프로그램의 힘은 엄청났다. 앞만 보고 내달리던 한국 사회는 양심이라는 안전선에 잠시 멈춰 숨을 돌렸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예능은 양심 대신 경쟁으로 채워졌다. '양심적으로 사는 건 손해'라는 인식도 사회 깊숙이 스며들었다. '양심'을 호소하는 게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이런 시대 분위기를 근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다. 50년간 진화생물학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해온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다. 그가 인생 2모작의 출발선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꺼내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남을 청했다. 유튜브 채널 '최재천의 아마존' 제작팀과 협업한 단행본 《양심》이 출간을 앞둔 시점이었다. 이화여대 종합과학관 연구실에서 만난 최재천 교수와의 대화는 양심에서 출발해 공정과 행복으로 이어졌다.

2년 전, 서울대 졸업 축사에서 꺼내신 주제가 '양심'이었다. 《양심》이라는 책 출간도 준비하고 계신데, 탄핵 정국에서도 '양심'이란 단어가 자주 소환되고 있다.
"그러게 말이다. 최근 정치인들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고 있어 흥미롭다. 이전부터 나는 우리 일상 대화에서 양심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있는 걸 관찰하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양심에 털 난 놈' '양심 엿 바꿔 먹은 놈' 하면서 굉장히 자주 듣던 단어였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오랜 기간 그 단어를 들은 기억이 없더라."
양심을 거론하는 게 촌스럽다는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양심을 얘기하는 게 안 어울리는 분위기가 돼버렸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양심까지 거론할 거 있냐'는 묵언의 합의를 봐가는 느낌이다. 그거야말로 불행한 거다. 우리 사회가 양심 스위치를 꺼버렸다는 뜻이다. 실제로 비양심적인 사람들이 너무 당당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됐다. 그중엔 좋은 대학 나온 높은 양반이 많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삶이 더 피폐해지겠다는 생각에 양심에 대한 화두를 던지게 됐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양심은 사전적 의미의 양심과는 다른가.
"양심이라는 건 정의하기 힘들다. 칸트는 사회 구성원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공통된 마음이라고 했다. 마틴 루터 킹은 하느님을 따르면 양심적인 사람이 된다고 했는데, 그건 반박하고 싶다. 종교인이라고 다 양심적인 건 아니다. 패트리샤 처칠랜드라는 뇌 과학자는 뇌에 문제가 있는 사람의 경우 양심적인 행동 자체를 못 한다고 하더라. 동물 행동을 연구하는 내 입장에선 그런 의견을 보면 궁금해진다. 뇌의 문제라는데, 왜 뇌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뒤집는 사람이 있을까."
어떤 결론에 도달했나.
"행동은 뇌뿐 아니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돈이든 출세든, 목전에 이익이 보이면 방향이 바뀐다. 양심이라는 건 마음속에만 존재하기에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못 숨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속이나. 그래서 아마 비양심적으로 행동한 사람들은 불편할 거다. 그 불편함을 참는 데 탁월한 사람이 있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논란에 휩쓸리기 쉬운 여러 사회문제 해결에 참여했다가 고초를 겪지 않았나.
"동강댐 건설 반대, 4대강 사업 반대, 호주제 폐지 등에 목소리 내고 난 뒤에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용감하지 않았다. 나서면 혼나는 게 걱정돼 도망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속에서 뭔가가 자꾸 걸렸다. 이, 얼어 죽을 양심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차마' 어쩌지 못한 거다. '어차피' 그러고는 찜찜해서 못 살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대놓고 해보기로 한 거다."
양심은 본래 존재하는 것인지, 살면서 만들어지는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두 개 다 있다. 프란스 드 발의 《공감의 시대》라는 책을 번역하면서 배운 게 있다. '공감력과 양심이 포유류에서 진화한 심성'이라는 것이다. 공감 능력을 갖춘 새나 뱀은 관찰된 적이 없다. 포유류는 다르다. 흰쥐도 공감력을 지녔다. 생쥐 5마리를 한 통에 넣어 밥을 주다가, 분리해 1마리에게만 음식을 준다. 4마리가 배고파서 신음을 내자 그 1마리도 굶기를 선택한다. 친구들이 못 먹는 걸 알고 식음을 전폐한 거다. 드 발의 주장대로 공감력은 포유류가 기본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공감력을 잃고 비양심적으로 살까? 부모들의 죄가 크다고 본다. 국립생태원장 재직 당시 충남 서천에 살았는데, 거기에 외국인 노동자가 많았다. 길을 가는데 외국인 집 아이랑 손잡고 있는 딸을 보고 부모가 두 아이 손을 떼더니, 물티슈를 꺼내 딸 손을 닦아주고 있었다. 너무 가슴 아팠다. 그 딸아이에겐 피부색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어른들이 편견을 갖게 한 거다. 그래서 내가 《공감의 시대》 번역자 서문에 '공감력은 길러지는 게 아니라 무뎌지는 것이다'라고 썼다. 본성이 무뎌지지 않는 교육을 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 분위기도 한몫하지 않나 싶다. 요즘 예능에는 이혼, 경쟁 등 자극적인 소재가 넘쳐난다. 1990년대 말 이경규의 《양심 냉장고》라는 TV 프로그램이 큰 인기였다.
"안 그래도 《양심》 서문은 《양심 냉장고》로 출발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1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이 1만 명을 넘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길에서 죽는 확률이 내가 정글에서 죽을 확률보다 몇천 배 높았다. 그런데 《양심 냉장고》 방영 후 교통사고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양심적 행동을 이끄는 분위기가 조성됐던 거다. 내가 양심이란 단어를 되살리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공정이었다. '양심'과 '공평'이 만나야 '공정'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우리 사회 정책은 대개 '차별은 안 했다. 똑같이 해줬다'에 있다. 그것도 잘 안 해서 탈이긴 한데, 똑같이 줘도 가진 게 너무 없는 사람은 그걸로 못 산다. 공정했다 말하지만 사실 그건 공평일 뿐이다. 약자를 조금 더 배려해야 진짜 공정한 사회가 된다. 그랬을 때 그 배려는 어디서 나올까? 내 안의 그것, 바로 양심이다. 양심이 공평을 공정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생각한다."
2024년 5월 출간한 《숙론》 에필로그에서 "K정치가 또 한번 세계인을 놀라게 할 날이 그리 멀지 않다고 확신한다"고 하셨는데, 2024년 12월에 정말로 그렇게 됐다. 그 놀라움이 긍정적인 의미로 기록될지는 두고 봐야 하는 상황 같지만.
"내가 그 얘기를 할 때는 길어야 20년, 빠르면 1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좋아지리라 예언한 건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로 인해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본다. 우리 국민이 이 난국을 벗어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탄핵 시국이 어떻게 끝나든 좋아지리라 믿는 건가.
"적어도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던 MZ세대로부터 놀라운 걸 보지 않았나. 핵심은 놓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들이 앞으로 (사회 주요 일들을) 결정해 나갈 텐데, 그러면 정치는 바뀔 수밖에 없다."
평소 "알면 사랑한다"고 강조해 오셨는데 지금 시대에 더욱 필요한 말이란 생각이 든다.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 선생이 '디스인포메이션'(허위조작정보)이라는 단어를 열심히 쓰고 계시더라. 가짜뉴스 같은 올바르지 않은 지식과 싸워야 한다고. '알면 사랑한다'와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모르는 걸 알아가는 학자라는 내 삶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파나마 스미스소니언 열대연구소에서 연구원 대표로 있을 때 일이다. 식당에서 전갈과 놀고 있는데, 그날 연구소에 처음 온 대학원생이 나를 보고 인종차별적 욕을 했다. '동양 놈이 무식해서 흉측한 걸 식당에 데려왔다'고. 그날 이후 전갈이 안 보이길래 '저 친구가 밟아 죽였구나' 했다. 그런데 몇 주 후, 그 친구가 식당에 배를 깔고 누워서 나를 부르더라. 죽은 줄 알았던 전갈이 새끼를 낳아서 업고 온 게 아닌가. 전갈은 새끼를 업어 키운다. 그런 전갈의 모성애에 감탄한 학생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먹이를 주고 있었다. 그때 확신했다. 충분히 알면 사랑하는 거라고. 이후 더 열심히 그 의미를 설파했다. 내가 학문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최재천의 인생'을 진화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성격적으로든 경력으로든 '변이'가 일어난 시기는 언제인가.
"전공을 택한 순간이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 시인을 꿈꿨지만, 이과로 배정되면서 꿈이 좌절됐다. 부모님 뜻에 따라 의대에 지원했지만 그 역시 떨어졌다. 담임 선생님이 2지망으로 써넣은 동물학과에 덜컥 합격해 서울대에 입학했는데, 뜻밖에도 나한테 너무 잘 맞는 분야임을 발견했다. 그것이 내 삶에 큰 영향을 줬다."
차선일 줄 알았던 선택이 최선이 된 셈인가?
"그런 셈이다. 나는 권위적인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부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분이셨다. 내 동생은 심장병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다. 어머니는 그런 동생을 병원에서 간호하다가도 아버지 퇴근 시간이면 헐레벌떡 집에 오셔서 밥을 차려야 했다. 아버지는 그 상황에서도 집에 들어서면서 창문 먼지 검사부터 하셨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공부 덕'이다.
내가 '부계혈통주의'의 생물학적 모순을 담은 의견을 제출해서 호주제 위헌 판결에 힘을 보탠 적이 있다. 그 일로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한참을 가만히 계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더라. '그거 내 자식인데,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놈이야'라고(웃음)."
아버지 입장에선 집안에서 굉장한 변이가 일어난 것 아닌가.
"동물을 관찰하다가 인간 세계를 보면 불편하다. 호모 사피엔스가 막강한 종임은 틀림없지만, 그저 동물의 한 종일 뿐인데, 홀로 딴짓하는 거에 대한 불편함이 계속 쌓였다.그러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 말을 잘못했다가 불려 가고,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내 학문을 너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공부를 하고 싶다."
73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셨다. 72년 말에 유신 헌법이 공포된 이후 그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장난 아니었다. 내가 겁이 많아서 비겁하지만, 객기가 또 있어서 쓸데없는 짓을 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제발 데모는 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직업 군인의 자식이 데모하다 잡히면 아버지도 날아가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얼어 죽을 양심'을 모른 척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렇다. 동승동 캠퍼스 시절에 서울대에 입학했다. 3학년 때 학교가 지금의 관악 캠퍼스로 옮겼다. 산으로 둘러싸인 부지라서 데모해도 아무도 모른다는 걸 처음엔 몰랐다. 언론만 통제하면 전 국민이 모른다. 한 마디로 독 안에 든 생쥐가 된 거다. 관악산 기슭에 또 북한군을 감시하기 위한 초소들이 있었다. 그 초소는 졸지에 서울대생 감시 장소가 됐다. 학생 셋만 모여 있어도 가죽 잠바 입은 사람들이 귀신같이 나타나 헤쳐놓았다. 어느 날 대대적으로 데모가 있었다. 총을 든 군인들이 밀고 들어왔다. 친구 두 명과 학과 건물로 도망쳤는데, 어떤 교수님이 자기 방으로 숨으라더라. 들어갔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교수님 저 나가겠습니다' 하고는 관악산을 넘었다.시흥으로 달려서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그때그 방에 남아 있던 친구들은 잡혀서 연행됐다. 별 탈 없이 풀려나긴 했는데, 내가 잡혔으면우리 아버지가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의 유학은 인생의 도피처였나, 새로은 세상에 대한 갈망이었나.
"도피에 가까웠다. 동물학과 나와서 마땅히 취직할 곳도 없었고, 학과 분위기도 암울했다.우리끼리 술 마시다 질질 짜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70년대 말에 유학 광풍이 불었다. 그 분위기에 나도 휩쓸렸다. 유학 가기 전전날쯤 환송회를 하는데, 다들 '벌레 연구해서 뭐 하냐. 돌아와서 교수도 못할 텐데'라고 했다. 그날내가 필름이 끊겼다. 후배들 전언에 의하면, 내가 소주병을 흔들고는 한마디 했다는 거다.'두고 봐라. 너희는 너희들끼리 피 튀기게 경쟁할 거다. 나는 무혈입성할 테니까 두고 봐라'라고. 15년 후에 실제로 서울대에 경쟁 없이 무혈입성했다. 한국에서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웃음)."
모두가 '레드오션'에 뛰어들어 출혈 경쟁을 벌일 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해 '블루오션'으로 거듭난 과정이 흥미롭다. 서울대로부터 교수직을 제안받았을 때 여러 생각이 들었겠다.
"사실 미국에 살기로 결심하고 한국에 대한 꿈을 버렸다.그리고 내 분야에서 미시간 대학은 탑이다.다들 자부심이 엄청나다. 하버드 전임 강사로 있다가 미시간 조교수로 갔을 때, 학과장이 나를 소개하며 이러셨다. '제대로 밟아 올라온 사람이다. '이류'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드디어 미시간 교수가 됐다'고. 그 정도로 자신만만한 대학이었으니, 덩달아 기분이 부풀어 올랐다. 이곳에서 이름을 날려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서울대로부터 교수직 요청을 받은 거다. 15년 미국 살면서 한국에 딱 두 번 왔다. 비행기 값이 워낙 비싼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만난 한국 여성과 결혼식 하려고 들어온 게 첫 번째, 서울대 초청으로 들어온 게 두 번째였다."
한국에 오기로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꾼 계기였나.
"한국 왔을 때 가족들에겐 세미나로 잠시 온 것뿐이라 했는데, 어머니들 촉이라는 게 무섭다. 미국으로 돌아가서 고민하고 있는데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예년 같으면 두 번 정도 혼절하셨을 텐데, 6개월째 안 하신다. 형이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표정도 건강도 달라지셨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가 심장 혈관 계통 문제로 혼절을 자주 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동생 말을 듣고 한국행을 결정했다."
지금 많은 과학자가 저술 활동이나 강연 등을 통해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고 있다. 그 길을 열어준 1세대다.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보다는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이다. 처음엔 그게 그렇게 눈 밖에 나는 일인 줄 몰랐다."
우리나라에선 외도한다고 보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 당시 미국에선 과학재단으로부터 연구비를 받으면, 일부를 저서나 강연 등으로 대중에게 알리는 데 써야 했다. 지도 교수셨던 윌슨 교수님도 연구로 바쁜 와중에도 대중 과학책 쓰고, 강연을 하시곤 했다. 교수님이 생물학과 수업은 안 하시고 법대 수업을 가길래 친구들과 항의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선생님 보고 대학에 왔는데,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교수님은 '법대 놈들이 훗날 사회를 주무를 텐데, 과학을 쥐뿔도 모르면 의회에 앉아서 맨날 과학 예산 깎지 않겠냐. 그래서 미리 가르쳐 놔야 한다'고 했다."
최근 몇 년간 가까이서 본 익숙한 풍경이다.
"이 얘기 하면 다들 웃는다.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국회의원 대부분이 문과 출신이라 이전에도 과학 연구개발(R&D) 예산을 자주 깎아왔다. 그런데 정부에서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짜 뜻밖이었다. 물론 문과-이과 문제는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제대로 아는 거다. 미국 역사에서 과학계가 가장 힘들어했을 때가 얼마 전 돌아가신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이었다. 반면 가장 좋았던 시절은 로널드 레이건 때를 꼽는다. 레이건은 과학을 잘 몰랐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자마자 과학계 사람들을 등용한 후, "나는 과학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러니 당신들이 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반면 카터 대통령은 조지아텍 공학 박사 출신인데,사사건건 개입하며 과학을 많이 망가뜨렸다. 이게 참 재밌는 거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알아야 리드할 수 있는 거다. 어설프게 리드하면 그것도 망하는 거다. 어쨌든 귀국 후 나는 당연한 걸 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눈총을 많이 받았다. 연구는 연구대로 열심히 했는데 마치 놀고먹는 사람 취급받는 것도 억울했고(웃음), 지금은 세상이 변했다. 과학 계통에 있는 많은 분이 적극적으로 대중에 다가가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또 날 시조새라고 불러주는데, 거듭 말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다."

은퇴 후 삶이 궁금하다.
"'숙론의 장'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볼까 한다. 쉽진 않을 거다. 하지만 변방에서 우리끼리 재밌게 숙론하고, 거기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서서히 주목받게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걸 '톰 소여의 전략'이라고 부른다. 《톰 소여의 모험》을 보면 톰이 벽에 페인트칠을 하는 벌칙을 받는다. 그런데 너무 재밌게 칠하니까, 친구들이 와서 '재밌냐? 나도 시켜줘라' 한다. 급기야 톰은 껌과 캔디를 받고 페인트칠을 허락해 준다. 우리끼리 재밌게 하고 있으면, 자칭 전문가라는 분들이 와서 먼저 동참의 뜻을 밝혀주리라 생각한다."
응원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정말 못하는 게 숙론이지 않나. 의대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사 집단 간의 갈등만 봐도, 대화는커녕 거대한 벽을 두고 등지고 있는 느낌만 든다.
"의대 증원 문제는 대화의 주체가 될 선수 기용부터 잘못됐다. 가장 중요한 환자가 빠졌으니 말이다. 환자 대표도 불러서 3자가 진솔하게 이 문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가능할까? 정치인들에 대한 못 미더운 시선이 많다.
"배워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숙론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어서다. 누군가가 정확하게 가이드라인을 주고, 그 룰을 지키면 가능하다. 넬슨 만델라가 27년 복역을 마치고 1990년에 출소했을 당시, 남아공은 흑백 갈등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때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남아공 지도자로 꼽힌 22인이 모여서 국가 미래에 대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다. 뜻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으니 싸움을 안 할 리 없지 않나. 그래서 이들은 나라 밖에 있는 중재 전문가를 초빙해서 사회 진행을 맡겼다. 그 사람이 다양한 갈등 조정 역할을 해 온, 캐나다 출신 애덤 카헤인이다.
그렇게 애덤 케헤인을 중심으로 숙론이 시작됐다. 진영 간 토론을 반복하면서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극좌', '중도좌', '중도우', '극우' 4가지 시나리오로 압축해 내놓았다. 그 4가지 시나리오를 책자로 배포하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전달하면서 시민들이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고 투표장에 갈 수 있도록 했고 남아공 시민들은 극좌를 선택했다. 넬슨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러나 만델라는 당선되자마자 '나는 4가지 시나리오를 통합한 정치를 하겠다' 선언하면서 남아공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우리도 충분히 가능하다. 애덤 카헤인 같은 탁월한 중재인을 기용하면, 중립적인 이를 중심으로 사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숙론할 수 있다고 본다."
"살아보니 인생 참 길더라"라는 말을 종종 해오셨다. 긴 인생을 살아보니, 삶이라는 건 어떤 것 같은가. 행복이란 또 무엇이던가.
"미국 소설가 조디 피코가 쓴 《19분》이라는 소설에 '행복의 수학 공식'이라는 게 나온다. 소설가가 정의한 행복은 '현실÷기대'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분자인 현실을 개선하거나, 분모인 기대를 줄이는 거다. 대부분은 분자를 키워서 행복해지려 한다. 요즘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경쟁은 심화되고, 악순환은 반복된다. 분모를 조금만 줄이면 결과값이 크게 나올 텐데 말이다. 나이가 들어 인생을 돌아보니 나는 한 번도 '기어코 저걸 쟁취하고야 말겠어' 한 적이 없다. 한 번도 소극적으로 살지 않았고, 호기심 많고 오지랖 넓어서 덤비며 살아왔다. 다만 그게 잘 안돼도 실망은 안 했다. 기대를 낮추고 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결과가 안 좋아도 스스로를 다독이며 금방 털어낼 수 있었다. 열심히 살되 스스로를 너무 다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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