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그 자체였던 남자… 그가 남긴 ‘퇴폐의 흔적’을 찾아서[북리뷰]

장상민 기자 2025. 2. 7. 09:4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파라다이스 나우
윌리엄 미들턴 지음│이상미 옮김│알에이치코리아
라거펠트 삶 세세히 담은 전기
50세에 샤넬서 새로운 삶 시작
분야 초월해 혁신적 유산 남겨
“그는 상상력이 뛰어난 연기자
변화무쌍한 매력과 배역 창조”
‘퇴폐’가 최고의 영감이라 밝혀
칼 라거펠트 공식 X 제공

패션의 대부. 샤넬의 황제. 패션계의 멀티 플레이어. 모두 한 사람에게 바쳐진 수식어이지만 그는 어떤 수식어로도 온전히 정의되지 않는다. 칼 라거펠트(1933∼2019). 패션 그 자체였던 남자에 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인 이 책은 외려 수식어를 모두 합해도 라거펠트의 삶을 채울 수는 없다고 말한다.

‘W’ ‘하퍼스 바자’ 등의 패션잡지에서 기획 에디터로 일하며 라거펠트와 인연을 맺었던 저자는 그의 전기를 준비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라거펠트의 모습만으로는 그의 생애를 전부 그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다행인 것은 여전히 라거펠트의 작업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세상에 남아 있으며, 그는 언제나 주변에 사람을 두었기에 그에 대한 증언을 넘치게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패션의 교황’으로 불리는 패션지 ‘보그’의 편집장 애나 윈투어와 책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입지전적 출판인 게르하르트 슈타이들, 마지막 순간까지 라거펠트의 곁을 지켰던 마지막 남자 세바스찬 욘디우까지. 책은 다양한 인터뷰와 영상물로부터 라거펠트의 말을 직접 인용하는 것을 넘어 때로는 그와 사적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를 연대기 순으로 그리면서도 종종 시간 축을 넘나든다. 1980년대 샤넬을 다시 일으켜 세운 라거펠트 컬렉션의 연원을 그가 어려서 처음 본 ‘디올 함부르크 패션쇼’와 청년기 때 심취했던 ‘18세기 프랑스 문화’로부터 찾아내는 식이다.

라거펠트가 남긴 혁신적 결과물, 그리고 그 주변의 다양한 증언을 통해 그려낸 인간 라거펠트는 뛰어난 ‘연기자’였다. “나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나는 미래를 상상하지도 않는다. 나는 오늘에 집중한다. 바로 지금이 천국이니까!” 그의 창의력은 모든 경험에서 왔음에도 그는 스스로 ‘출처 모를 영감의 소유자’를 연기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라거펠트는 당대 최고의 상상력을 가진 디자이너였던 동시에 뛰어난 연기자였다. 그러나 누군가를 모방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지금 이 순간 가장 뛰어난 디자인과 배역을 창조해냈고 소름 돋는 연기력을 보여줬다.

라거펠트의 오랜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이브 생로랑은 이미 2002년 자신의 브랜드로부터도 은퇴해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다른 예술가들은 파리 패션계에서 훨씬 일찍 물러나 사라졌다. 그러나 라거펠트는 달랐다. 죽는 순간까지 37년 동안 샤넬의 디자이너로서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무엇보다 그가 전 세계 패션 피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이유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트 쿠튀르를 넘어 H&M으로 대표되는 레디 투 웨어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혁신적 영감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이 노년에 가까워질수록 도전을 겁낸다고 하지만 그가 H&M에서 협업을 제안받고 던진 질문은 단 한 가지였다. “혹시 다른 디자이너에게도 제안했었나요?” 그에겐 처음이라는 사실, 그것만이 중요했다. 샤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50세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그는 사진, 출판, 영상과 영화, 무대, 건축까지 예술이 존재하는 영역이라면 어디든 자신의 서명을 새겼다.

책은 라거펠트의 유년시절부터 한 남자를 가운데 둔 이브 생로랑과의 사랑싸움까지, 가려져 있던 많은 부분을 꺼내 보인다. 읽고 있자면 한 방에서 라거펠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공백도 있다. 라거펠트 스스로 최고의 영감이라고 말했던 ‘퇴폐’의 미학. 라거펠트는 마약이나 성병으로 망가지지 않았던 단단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사치스러우며 욕망을 긍정한 사람이다. 책을 읽는 순간 이미 최고의 예술가, 라거펠트를 알아버렸다. 책장을 덮는 순간에도 독자들은 삶에 들어온 그 천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가 남긴 퇴폐의 흔적을 찾아 나설 것이다. 652쪽, 4만8000원.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