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시멀리스트의 여행, 멜버른 카페가 내게 남긴 것
여름날의 퇴사, 겨울로의 일탈 그리고 카페 & 커피.

어느 해 여름의 입구에서 오래 다니던 직장의 퇴사를 결심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회사 문을 나섰다. 커다란 결정을 비로소 실행했음에 안도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한 톨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밤, 오랜만에 내일의 걱정 없이 깊은 잠을 잤다.
퇴사하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꾼다는 퇴사 후 여행은 내게 그다지 큰 기대를 주는 요소가 아니었다. 다만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긴 여행을 해 볼까?' 하는 마음이 떠나고자 하는 욕구를 부추겼다. 자아 탐색이니 동기 부여니 하는 거창한 의미는 두지 않기로 했다. 그저 낯선 곳에서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 바랐다. 여행지를 고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본 투 비 여름 헤이터(어쩐지 서머보다는 여름이라는 단어가 한국의 고온다습한 기후를 떠올리게 만든다)'인 나는 여름으로부터 도망쳐 겨울로 가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목적지는 호주 멜버른. 처음 가 보는 도시였지만 마침 그곳엔 전생에 자매 사이가 아니었을까 싶게 성향도 취향도 꼭 닮은 후배가 지내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렇게 반대의 계절로 날아갔다.
멜버른 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것은 숨을 한가득 들이마시고 내쉬는 일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정수리까지 얼려 버리는 느낌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입김까지 나자 정말 아주 다른 곳에 와 버렸구나, 실감이 났다.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온 건 처음이었기에 생경하면서도 사뭇 통쾌했다.
생경한 첫인상은 이내 익숙함으로 변했다. 반듯하게 조성된 도시 구획, 해묵은 건물과 번쩍이는 새 건물이 견주어 선 풍경, 우중충하게 이어지는 날씨. 오래전 잠시 머물렀던 시애틀과 겹쳐 보였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러고 싶어서인지 괜스레 내적 친밀도가 높아져서는 원래 여기 살았던 사람인 양 도시를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보니 구글맵도 필요가 없어졌다. 스마트폰에 기대지 않고 걷다가 눈에 들어온 탐나는 장소들을 맘껏 탐험했다.

제일 탐닉에 몰두했던 건 카페. 멜버른은 커피 & 카페 문화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도시다. 이곳의 커피 문화는 2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머물며 본격적으로 발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탈리안의 못 말리는 커피 사랑이 이렇게나 큰 영향을 미칠 줄이야. 호주 최대 규모의 커피 엑스포도 멜버른에서 매년 개최된다. 요즘 우리가 흔히 카페에서 만날 수 있는 메뉴인 플랫 화이트(Flat White)도 호주에서 시작된 것이란 사실. 무려 2,000개 이상의 카페와 전문 로스터리 그리고 수준 높은 바리스타가 상주하는 도시가 바로 멜버른이다. 그렇기에 나는 한 달 남짓 멜버른에 머물며 시내에서 맛있다고 이름난 카페는 대다수 섭렵했다.
그중에서도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카페는 마켓 레인 커피(Market Lane Coffee)였다. 커피 맛은 물론 도심 곳곳의 지점마다 각각의 특색을 살린 고유의 분위기, 감각적인 디자인 요소들, 친절한 직원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설렘을 안고 도장 깨기 하듯 다양한 지점들을 두루 방문했는데, 그중 사우스 멜버른 지점은 내게 기분 좋은 첫인상을 만들어 준 곳이었다. 아담하지만 알찬 카페 공간은 카페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에코백이 인테리어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미 사 놓고도 빛을 보지 못한 에코백이 집에 한가득이지만 어쩐지 이곳의 에코백만큼은 꼭 사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의 소리를 진정시키며 진열된 가방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애써 못 본 척 시선을 거두고 구매욕을 참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에코백에 관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이유는, 이러한 내 찰나의 번뇌(?)를 기가 막히게 간파한 나의 후배가 이튿날 내게 바로 '그 가방'을 깜짝 선물로 건넸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은 내가 사고 싶되 사지는 않았으나, 결국엔 내게로 오게 된 운명적인 물건에 관한 이야기다.
그렇게 6년 전쯤 나와 감격스럽게 인연을 맺은 마켓 레인 커피 에코백에 대한 사랑은 다행히도 현재 진행형이다. 13인치 노트북도 거뜬하게 품어 주는, 맥시멀리스트에게 최적화된 크기에 탄탄한 재질, 깔끔한 디자인이란 장점 덕분에 여전히 나와 동행 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맘 먹고 저지른, 나만의 소소한 일탈이었던 멜버른 한 달 살기 여행의 작은 행복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자꾸만 손이 간다. 멜버른 카페의 직원들은 언제나 나를 이방인이 아닌 도시의 일원으로 바라보며 말을 걸어 주었고, 덕분에 낯선 도시에서도 안도할 수 있었다. 때론 여행에서 가져온 물건이 떠나온 도시에 대한 감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기도 한다. 마켓 레인 커피의 에코백은 익숙함을 뒤로하고 떠났던 그때, 그곳에서의 다채로운 감정과 감각, 추억의 면면을 품고 있기에 애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나영 작가의 맥시멀리스트 여행
여행이 일의 한 부분이던 시절, 다채로운 도시들을 탐험하며 부지런히 작은 물건들을 사 모았다. 같은 종류만 고집하며 모았으면 나름의 컬렉션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후회를 거듭하면서도 여전히 홀딱 반한 물건들을 수집하는, 사물 한정 금사빠의 사는(buy) 이야기.
글 사진 김나영 에디터 강화송 기자
Copyright © 트래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겨울 섬에서 찾은 10가지 맛 - 트래비 매거진
- 부산에서 떠난 ‘48시간 홍콩 여행’ - 트래비 매거진
- '트래비'가 선정한 2월의 맛 - 트래비 매거진
- 겨울이니까, 하얼빈 - 트래비 매거진
- 원주, 1박 2일 도시 여행법 - 트래비 매거진
- 일본 '효고'에서만 맛 볼 수 있는 별미 8 - 트래비 매거진
- 지금, 주목해야 할 서울 호텔 레스토랑 4 - 트래비 매거진
- ‘오사카’ 현지인이 모여드는 맛집 & 카페 4 - 트래비 매거진
- 완벽은 내려놓고 신나게 여행하는 법, 김경일 & 제시카 민 인터뷰 - 트래비 매거진
- 대한민국 국적 항공사가 예외없이 취항하는 해외 도시는? - 트래비 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