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14. 파초 잎을 자르며(1939년 1월 ‘박문’ 4집)

김진형 2025. 2. 7. 00:0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양심에 부끄럼이 없다면, 한탄할 것이 무엇이냐”
1939년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시기
문인·언론인 변절 유혹·강압 시달려
힘겨운 시기 파초 통한 비유·풍자 담아
‘5척 2촌’ 키 언급 차상찬 신장 짐작 근거
김동인·김성수 등 많은 변절 속 신념 굳건
겨울철 좁은 집에 들일 파초 자르며 독백
부귀영화 대신 양심 택한 스스로를 위안
자신의 안위 보다 힘든 동포 처지 살펴
순 잘리는 살풍경 없는 조선의 행복 희망
작은 거인 차상찬의 높은 마음의 키 보여
▲ 차상찬 ‘파초 잎을 자르며’ 원문.

나는 화초를 매우 좋아한다.

봄이나 여름철이 되면 바깥 볼일을 보고 집에 들어가서는 으레 화초에 물 주기와 손질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산이나 들에 산책하러 가도 좋은 화초를 보면 캐다 심으며, 또 거리에서 화초 장사를 보던지 어떤 백화점 화초 파는 곳을 가도 마음에 드는 화초가 있으면 주머니 예산이 들어맞으면 한두 화분씩은 사들인다.

그러므로 집이 비록 왜소하고 뜰이 좁으나마 늦은 가을과 겨울철을 제하고는 언제나 화초가 한 삼사십 종류가 있어서 옛사람의 시에 이른바

온 뜰에 꽃이 피니 가난한 것 같지 않다(滿院花開不似貧)

라는 말과 같이 집이 제법 번화한 것 같고 부유한 듯도 하다. 문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가끔 들여다보며 아이고 그 집은 작아도 화초는 꽤 많다고 하며, 동네 어린 사람들은 우리 집을 가리켜 화초 많은 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화초 중에는 가장 공을 들인 것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두 그루의 밀감나무요, 또 하나는 파초다. 밀감나무는 지금 심상 소학교 육 학년 다니는 어린 딸애가 심은 것으로 지금 일곱 해나 되어 5척 2촌밖에 안 되는 내 키보다는 훨씬 크다. 파초는 삼 년 전에 내가 이웃 친구 집에서 얻어다 심은 것으로 그것도 키가 제법 나보다 크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두 물건은 모두 더운 지방의 산물로 추위에 약한 까닭에 겨울철이 되면 방안에다 들여놓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작년에는 그것을 좀 더 잘 자라게 하느라고 전과 같이 화분에다 심지 않고, 특별히 땅에다 심어서 비료를 주었더니 엄청나게 잘 자랐다. 그중에도 파초는 키가 한 자나 더 자라고 통이 매우 굵으며, 곁에서 새싹이 셋이나 나서 아주 탐스럽게 되었다.

그러나 급기야 겨울철이 닥쳐오니 그것을 보관할 일이 큰 걱정이었다. 남과 같이 온실의 설비도 없고 그 전처럼 방에다 들여놓자니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낮은 방에 들여놓을 수도 없고, 화초집에다 맡기자니 거리도 멀고 돈이 또 든다. 이리 생각 저리 생각하다가 최후에는 할 수 없이 웃자란 순을 잘라서 방에다 들여놓기로 작심하였다. 그러나 칼을 가지고 그 탐스러운 순을 자르자니 마치 사랑하는 애인의 목을 자르는 것같이 애처로워서, 차마 손을 대기 어려웠다. 칼을 들고 한참 있다가 파초를 향하여,

▲ 차상찬 ‘파초 잎을 자르며’ 원문.

이 애 너는 왜! 고대광실의 그 좋은 집을 다 버리고, 하필 좁고도 낮은 우리 집으로 와서 이 고생을 하느냐!

하고 한탄하고 또 나를 스스로 책망하면서

너는 무슨 팔자를 타고 나서 오십 고개를 훨씬 넘도록 변변한 집 한 채도 가지지 못하고, 그 꼴에다 파초는 좋아할 줄 알아 남산골 샌님의 옥관자 걱정하듯이 공연한 걱정을 하느냐!

하며 한번 슬퍼하고 한번 웃다가, 다시 또 파초를 향하여!

파초야 내가 네 순을 자르는 것은 너를 해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요. 너를 살리기 위하여 그러는 것이니, 부디 섭섭하게 여기지 말아라! 새해에라도 내 집이 커진다면 너는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잘 위하여 주리라.

하고 위안의 말을 하고, 또 나에게도 스스로 위안의 말을 하는데,

너의 동포 중에는 지금, 이 겨울철에 옷이 없고 집이 없어 벌벌 떨고 우는 사람이 몇천몇만 명이 있는데 너는 호강스럽게 도리어 파초 보관할 수 없는 것을 한탄하느냐? 아무리 방이 좁고 얕더라도 너의 양심에 부끄럼이 없다면, 너의 키는 클 대로 크고 너의 마음은 펼 대로 펴고, 너의 발은 뻗을 대로 뻗을 것이니, 구태여 집이 적은 것을 한탄할 것이 무엇 있느냐?

하고 이렇게 여러 번을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결국 들었던 칼로 그 파초의 상순을 선뜻 잘라서 방에다 들여놓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그 파초를 살리기 위하여 상순을 자르지마는 참말로 꼬부라진 쇠뿔을 바로잡으려다가 소를 죽인다는 격으로 만일 저 파초의 순을 잘못 잘라서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에 보니 그 파초는 순을 자랐는데도 불구하고 새순이 파랗게 자라 나온다. 그것을 볼 때 나의 마음은 여간 기쁘지 않았다.

지금 나의 침실 안에는 그 파초와 또 밀감나무가 홀로 봄을 만난 듯이 서로 바라보며 청청하게 자라고 있다.

오!

올해 새해에는 나에게도 행복이 돌아오고, 파초에게도 또 행복이 돌아와서, 오는 겨울철에 그 애처롭게 순을 자르고 순을 잘리는 살풍경의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해설

차상찬의 외모를 묘사한 글은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1933년 1월 ‘제1선’에 김규택 화백이 그린 차상찬 캐리커처와 함께 실린 글이 제일 압권이다.

차상찬이 직접 자신의 외모를 거론한 대목이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재치 있는 묘사가 많이 보이는데 ‘밝게 빛나는 대머리’에 ‘키가 작아 뒤에서 보면 소년을 능가한다’는 등의 표현이 읽는 이를 웃음 짓게 한다. 10년이 지나도 똑같은 모습에, ‘길거리의 전봇대도 늙는데 차상찬은 그렇지 않다’고 비유하는 대목에서도 그의 유머러스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물론 차상찬 스스로가 자신이 늘 푸르고 청년 같길 바라 호를 ‘청오’라 한다고 밝힌 바 있으나, 그의 외모 역시 이에 못지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차상찬에 대해 강의를 하다 보면 가끔 선생의 키가 얼마나 작았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 선생의 키를 말해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글 ‘파초 잎을 자르며’에 나온다. 스스로가 자신의 키가 일곱 해를 키운 밀감나무와 3년을 키운 파초보다 작은 5척 2촌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1척이 30.3㎝로 통용되니 5척 2촌은 대략 156㎝ 전후로 짐작할 수 있다. 사할린에 강제 징용되었던 조선인들의 키를 연구 조사한 조영준 교수의 기록에 비추어보면 차상찬과 출생연도가 가까운 이들의 키가 평균 162㎝ 정도였으니 차상찬은 실제 평균보다 작은 키였던 셈이다.

하지만 차상찬은 키만 작았을 뿐 당시를 살았던 그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큰 삶을 살았다. 이 글이 쓰인 1939년이라면 중일전쟁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던 시기로 많은 문인과 언론인들이 변절의 유혹과 강압에 시달리던 때였다.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던 문인인 김동인과 이광수, 언론인이었던 김성수와 방응모도 마찬가지였다.

김동인은 1938년 2월 4일 자 ‘매일신보’에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전하고 선동하는 ‘국기’라는 산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친일의 길에 들어섰고, 이광수는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후 여러 정신적 방황 후 결국 1939년 1월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행보를 보였다.

한편 언론인 김성수는 1936년 11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 이사직에서 물러난 후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경성방송국 라디오 시국 강좌를 맡으며 친일의 길을 걸었다. 조선일보의 사장이었던 방응모는 1935년 자신이 창간했던 잡지 ‘조광’을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점차 친일적 성향의 잡지로 끌고 갔고, 조선일보도 매한가지였다. ‘민족지’를 자처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슬픈 발자취이다.

차상찬에게도 이 시기는 참이나 힘겨운 때였을 것이다. 누구나 아는 언론인이었던 그에게도 적지 않은 강요와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함께 개벽사를 이끌거나 근무했던 이들마저 변절했다는 소식은 몹시 가슴 아프고 두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파초 잎을 자르며’라는 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다양성이 존재하겠지만 시기적으로 파초를 향한 그의 독백들이 심상찮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집이 작아 어쩔 수 없이 상순을 잘라내야 하는 파초의 처지가 아마도 차상찬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새해라도 집이 커지면 온전히 키워준다는 바람도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아프게 다가온다.

변절만 한다면 지붕 높은 집 하나쯤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고, 제아무리 크게 자라는 파초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유혹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힘든 동포들의 처지를 살피며 ‘양심에 부끄럼이 없다면, 한탄할 것이 무엇이냐’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

파초는 당시 경성의 화초애호가들에게는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러니 차상찬 역시 바나나와 같은 과로 분류되는 파초는 상순을 싹둑 잘라내도 다시 기세 좋게 잎을 틔운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초를 통한 비유와 풍자를 통해 자신은 물론 조선 동포에게도 행복이 돌아오길, 살풍경의 일이 다신 없기를 절실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는 것이다. 실제 파초는 4미터까지도 자라는 식물이다. 156㎝인 작은 거인 차상찬의 높은 마음의 키를 읽을 수 있는 글이 분명해 보인다.

△현대어 번역=강원문화교육연구소
△발췌문헌= ‘剪芭蕉’ (전파초), 1939년 1월 ‘박문’ 4집
△해설=이현준 한림대 강사·차상찬기념사업회 이사

 

#차상찬 #부끄럼 #겨울철 #밀감나무 #언론인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