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지구 美가 장악해 휴양지로 개발”... 트럼프식 팽창주의

워싱턴/박국희 특파원 2025. 2. 5.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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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네타냐후와 회담 후 밝혀
“팔레스타인 200만명 인접국 이주”
아랍권 반발... 美언론도 “제국주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 미국이 직접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장악해 소유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킨 뒤 지중해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가자지구는 2023년 10월부터 지난달까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의 통치 지역인데 이곳을 미국이 소유하겠다고 한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말부터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매입해 미국 땅으로 삼겠다고 말해왔고, 1999년 파나마에 넘긴 파나마운하 운영권을 회수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웃 캐나다를 관세 문제로 압박하면서 “미국의 51번째 주(州)가 되라”고 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중동의 땅을 부동산 개발업자 출신 미국 대통령이 유망 휴양지 개발 지역으로 점찍고 “미국이 갖겠다”고 선언했다. 지난달 29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휴전에 돌입한 뒤 피란 생활을 하던 가자지구 주민들이 무너진 건물더미를 지나 집으로 향하고 있다. 트럼프는 4일 가자지구를 미국이 장악·소유해 지중해 휴양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로이터 연합뉴스

외국 땅이나 시설을 미국이 ‘접수’하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이 이어지면서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트럼프식 제국주의’(뉴욕타임스)가 고개를 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이날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가자지구를 장악(take over)해 소유(own)하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가자지구를 개발하면 중동의 ‘리비에라(Riviera·지중해의 휴양지 밀집 지역)’가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또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주민 약 200만명을 인접한 이집트나 요르단으로 강제 이주시켜야 한다고 했다. 어떤 식으로 가자지구를 장악·소유할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필요할 경우 미군을 보낼 수 있다”고도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이슬람 무장단체 하마스가 휴전 협정을 체결한 후인 지난 17일 피란 갔던 가자지구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타스 연합뉴스

이날 트럼프의 발언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합의로 공인(公認)돼 온 ‘두 국가 해법’을 노골적으로 무시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두 국가 해법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자 독립국가를 만들어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1940년대 유대인들이 국가 창설을 위해 중동으로 대거 이주하고 아랍인들이 반발하면서 갈등이 커지자 유엔이 1947년 유대인 국가와 아랍인 국가를 세우는 분할안을 통과시킨 것이 시초다. 반복되는 유혈 충돌을 멈출 지향점으로 유엔 등 국제사회가 지지해 왔다.

◇이·팔 80년 ‘두 국가 해법’ 부정한 트럼프… “중동 판도라 상자 열어”

트럼프의 이날 발언 수위는 ‘두 국가 해법’을 축으로 하는 중동 질서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는 “가자지구 주민들이 아름다운 지역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방법을 찾을 것”이라며 “이웃 이집트와 요르단으로 (이들을) 재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2023년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전쟁이 발발했고,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벌인 하마스 격퇴전으로 민간인과 하마스 대원 등 4만6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 여파로 피란 생활을 해오다 지난달 휴전에 돌입하면서 귀향 중인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이다. 트럼프는 이런 발상의 명분으로 ‘가자지구 주민의 개선될 삶’을 들었다. 그는 “하마스가 가자지구를 지옥 구덩이로 만들었고, 주민들을 형편없이 대했다. 위험하고 불안정한 콘크리트 더미 아래에서 살고 있는 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래픽=백형선

가자지구를 통치 중인 하마스와 중동 국가들은 즉각 반발했다. 하마스 측은 트럼프의 발언이 나온 직후 성명을 내고 “(트럼프 발언은) 혼란과 긴장을 초래한다. 가자지구의 우리들은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랍권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교부 명의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의 (유대인) 재정착, 영토 합병, 팔레스타인인 퇴거를 통한 팔레스타인인 권리 침해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성명에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 없이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발언도 포함됐다. 트럼프는 이스라엘과 사우디를 중동 외교의 두 축으로 삼고 궁극적으로 두 나라의 국교 수립을 중재하겠다는 구상을 세웠는데, 한 축인 사우디가 즉각 반발한 것이다.

트럼프가 가자지구 주민들을 수용할 국가로 전부터 지목된 이집트 외교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가자지구의 재건은 팔레스타인 주민이 가자지구를 떠나지 않는 상태로 이뤄져야 한다”고 반대 의사를 명확히 했다. 요르단도 지난 1일 다른 중동 국가들과 낸 공동성명을 통해 “지역 안정을 위협한다”고 비난했다. 트럼프는 이날 “그들(이집트·요르단)은 ‘(가자지구 주민들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지만, 내가 말하겠다.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가자지구를 지중해 휴양지 ‘리비에라’에 빗대며 향후 미국 주도로 관광지로 개발하겠다는 구상까지 밝혔다. “우리는 가자지구를 개발해 일자리 수천 개를 만들고 중동 전체가 이를 매우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가자지구의 잠재력은 믿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지중해 해안을 접하고 있는 가자지구의 특성을 살려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 이를 미국이 주도해 수입도 챙기겠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트럼프는 “(미국이 가자지구를) 장기간 소유해야 중동 전체에 큰 안정을 가져오리라고 본다”고도 했다.

팔레스타인 땅을 미국이 장악하겠다는 트럼프의 계획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공존 방안으로 국제사회가 지향하는 유일한 합의안인 ‘두 국가 해법’과 충돌한다는 지적이 많다. 1948년 건국한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을 통해 서안·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이후 이스라엘 통치에 항거하는 팔레스타인의 무장 봉기(인티파다) 등이 이어지며 분쟁이 격화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출된 것이 ‘두 국가 해법’이었다. 이는 국제사회를 대표하는 유엔이 관련된 결의안 채택을 반복하며 유일하게 인정하는 해법이기도 하다. 지난해 말에도 유엔총회는 “흔들림 없이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픽=양진경

앞서 1993년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중재해 “서안·가자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우고, 이스라엘과 평화적으로 공존한다”는 내용으로 체결된 ‘오슬로 평화협정’의 골자도 ‘두 국가 해법’이었다. 협정을 체결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과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하면서 ‘두 국가 해법’은 절대적 공신력을 얻었다. 이후 미국 정부는 공화당·민주당 정권을 막론하고 이 해법을 중동 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스라엘에서도 강경 우파 성향의 현 네타냐후 정권을 제외하면 대체로 이 해법을 따랐다. BBC는 “트럼프의 계획은 국제사회가 합의한 ‘두 국가 해법’이 완성될 가능성을 없애고 아랍권의 단호한 반발을 부를 것”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가 중동의 지정학적 ‘판도라 상자’를 다시 열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20일 취임한 후 트럼프는 다른 국가의 영토를 취하겠다는 발언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국제 질서를 흔들고 있다. 그는 앞서 지난해 12월 덴마크 주재 미국 대사 인선을 발표하면서 북극권의 지정학적 요충지인 그린란드를 덴마크에서 매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미국이 건설했지만 1999년 파나마에 운영권을 넘긴 파나마운하에 대해 ‘중국이 장악하고 있다’며 파나마 정부에 운영권 반환을 요구하겠다고도 말했다. 이 같은 주장이 파장을 일으키긴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트럼프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미국이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인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미국 MSNBC는 “트럼프가 ‘우리가 가자지구를 갖겠다’는 부동산 개발업자식 표현을 쓴 것을 두고 ‘미 제국주의(American imperialism)’라고 평가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는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의 영토 확장을 꾀하는 대통령”이라며 트럼프 2기를 ‘새로운 미국 제국주의(The new American imperialism)’로 정의했다.

☞가자지구

서안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구성하는 지역. 지중해에 면해있으며 부산시 절반 면적(365㎢)에 인구는 약 200만 명이다. 1967년 3차 중동 전쟁 때 이스라엘이 점령했지만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을 계기로 1994년 5월부터 팔레스타인 자치가 시작됐다. 2007년부터 서안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분점 통치하고 있다.

☞두 국가 해법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이스라엘 정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합의한 원칙.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해 이스라엘과 평화 공존하자는 구상이지만 양측 강경파의 반발 등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1947년 유엔이 통과시킨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의 분할안이 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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