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낡은 고전 속 흡혈귀의 부활

조재휘 영화평론가 2025. 2. 5. 19:2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노스페라투'(1922)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빠지지 않는 고전으로 꼽힌다.

'드라큘라'의 판권을 얻지 못하자 저작권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각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자 브람 스토커의 부인이 제기한 소송에 패해 원본 네거티브 필름을 없애는 비운의 역사를 겪은 이 무르나우의 걸작은 장르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2024)는 이 걸작 무성영화의 두 번째 리메이크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스페라투(2024)

‘노스페라투’(1922)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빠지지 않는 고전으로 꼽힌다. ‘드라큘라’의 판권을 얻지 못하자 저작권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각색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작자 브람 스토커의 부인이 제기한 소송에 패해 원본 네거티브 필름을 없애는 비운의 역사를 겪은 이 무르나우의 걸작은 장르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햇빛에 약한 흡혈귀와 같은 관습적 표현 상당수가 실은 이 작품에 연원을 두고 있다.

영화 ‘노스페라투’의 한 장면.


로버트 에거스의 ‘노스페라투’(2024)는 이 걸작 무성영화의 두 번째 리메이크다. 앞서 베르너 헤어조크가 클라우스 킨스키, 이자벨 아자니 주연으로 ‘노스페라투’(1979)를 내놓은 바 있다. ‘더 위치’(2015)와 ‘라이트 하우스’(2019)에서 도저했던 음울한 오컬트적 무드와 잔혹성과 고딕적 취향이 반영된 양식미, 중력처럼 인물을 짓누르는 깊이 있는 암부 표현을 떠올리자면 그 외에는 이 클래식의 부활에 적임인 감독을 찾긴 어려웠을 것이다.

무르나우의 기본적인 이야기에 헤어조크의 몽환적인 시각화와 캐릭터 해석(쥐 떼로 들끓는 적막해진 도시, 오랜 고독에 지친 남자로 노스페라투를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 양자 모두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거기에 자신의 신경증적인 연출을 덧대는 일종의 총집대성. 현대화된 각색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이 정공법이 도리어 놀라울 법하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현대의 ‘노스페라투’가 충실한 계승에만 그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이 낡은 고전을 되살리기로 한 건, 그 안에 담긴 의외의 동시대성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외로움에 떨며 곁에 있어 줄 누군가를 갈구하는 엘렌(릴리 로즈 뎁)의 기도로 열린다. ‘엑소시스트’(1973)에서 그랬듯 악마는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공허한 영혼을 좋아하고, 부모의 무관심에 방치되어 애정의 그릇이 텅 비어버린 사춘기 소녀는 훌륭한 표적이 된다. 애정 결핍으로 남편에게 집착하며 분리불안을 호소하는 그녀의 태도에서 암시되듯, 진정한 공포는 관계성의 부재에 말미암은 영혼의 파괴에서 오는 것이다.

엘렌을 찾는 노스페라투의 그림자가 마을을 뒤덮자, 일대는 쥐 떼와 전염병에 휩싸인다. 이때 감독은 이전엔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팬데믹 상황을 전면에 부각하고, 비상사태를 맞은 사람들의 혼란과 상실에 주안점을 둔다. 만연한 감염의 공포와 관계의 붕괴. 19세기 흑사병을 은유했던 흡혈귀의 저주는 코로나의 전 지구적 유행, 고립과 단절을 상기시키는 역사적 대응물로 우리가 경험한 재난의 기억에 고스란히 포개진다. 이로써 해묵은 고전의 리메이크는 시대의 초상을 반영한 우화라는 동시대적 의미를 새로이 획득하는 것이다.


무르나우의 원전은 1차 세계대전을 겪은 직후 독일의 사회적 불안을 반영한 것이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리고 혼란한 정치 상황과 불안한 경제, 원망의 대상을 찾는 외국인 혐오의 만연은 나치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새로운 리메이크의 등장과 반향은 ‘오래된 미래’의 위기를 다시 맞이해 흉흉해져가는 우리 시대의 무의식에 조응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