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촌 아이들의 연극 [김민형의 여담]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궁핍한 시대에 시인이 무슨 쓸모인가? 독일의 낭만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1801년 시 ‘빵과 술’에서 던진 질문이다.
가자 전쟁 1년 4개월 만에 겨우 ‘불안한 정전’에 이른 지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느닷없이 가자지구를 미국이 오래 소유하면서 휴양지로 개발하겠다고 했다. 트럼프발 거대한 혼돈이 시작되는 가운데, 수십만 가자 난민이 폐허가 된 집으로 돌아가는 참상과 풀려나는 이스라엘 인질들의 가련한 모습은 끝없는 난제들의 난무를 비참하게 보여준다.
가자전쟁은 주위 국가들로도 번져 나가 레바논은 지난해 미사일과 드론 폭격으로 수천명의 인명 피해를 보았다. 얼마 전에 레바논을 중심으로 요르단,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포함한 중동 지역에서 활동하는 자선단체 ‘시나리오’의 대표 빅토리아 럽턴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시나리오는 사회 약자층, 특히 위기에 처한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예술 치유와 교육을 제공하는 기관이다. 그들의 철학은 웹사이트(seenaryo.org)에 쓰인 구호 ‘놀이와 연극을 통한 평생 교육’으로 요약된다. 2015년 설립 이후 공연, 교사 연수, 놀이 중심의 교육자료 제공 등으로 15만명 이상의 지역 주민들과 접촉해왔다. 참고로 레바논은 거주자 넷 중 한명이 전쟁 난민으로 분류돼 난민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이 단체의 시작도 2011년에 발발한 시리아 내전의 150만 난민을 돕자는 동기였다.
시나리오의 연극은 참여자들이 스스로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 연기함으로써 일깨워지는 창의력과 자아 성장에 초점을 맞춘다. 극과 놀이가 교육의 모든 면에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럽턴 대표의 철학에 의하면 연극은 어느 예술보다도 참여자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효율적으로 표현해 준다.
난민촌에서도 시나리오 이벤트에 대한 수요는 굉장히 높다. 전쟁 중인 지난가을에도 럽턴은 남편과 어린 딸을 데리고 베이루트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극심한 재난 속에서도 시나리오는 21개 대피소로부터 연극과 놀이 중심 교육을 제공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생사를 걱정하는 일상에서도 아이들은 배움과 놀이로 전쟁의 끊임없는 공포를 초월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럽턴 대표는 당연히 자기 일에 회의를 느낄 때가 많다.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는 마당에 무슨 연극이냐’는 생각이 드는 순간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을 통해 불안을 탈피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어린이의 밝은 모습은 이런 근심을 언제든 덜어준다고 그는 설명한다.
우루과이 기자 갈레아노의 에세이 ‘예술의 한계’에 나오는 이야기다. 중미 엘살바도르의 조용한 마을 친퀘라는 1980년대 내전 당시엔 끊임없이 이어진 비극의 중심지였다. 특히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어느 날 저녁, 사진작가 하나가 죽음의 향기 가득한 교회 옆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곳저곳에 시신이 널려 있고 흙과 잔디는 피범벅이다. 기이한 정적에 잠겨 있는 길바닥은 저녁놀에 붉게 물들고 그와 친하던 반란군 전사 쌍둥이 형제 중 하나가 넋을 잃고 수많은 총알구멍으로 장식된 벽에 기대고 앉아 있다. 소총 두 자루는 십자가 모양으로 발 앞에 던져지고 동생의 피투성이 시신이 무릎에 놓여 있다.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작가는 이 장면의 미학적 평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두 사람의 처절한 모습을 사진으로 포착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조준한다. 예술적으로 완벽한 순간이다. 그러나 어쩐지 오래 망설이며 서 있는 그의 손가락은 카메라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대작을 포함해서 인간의 비극을 예술로 만드는 행위는 일종의 착취라는 느낌을 피하기 힘들다. 이 까다로운 이슈에 대해 럽턴에게 물으니 그는 ‘주체성’의 관점에서 답한다. 자신들의 목적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스스로 목소리와 인간적 존엄성을 되찾게 도와주는 일이라고. 즉, 피카소의 그림과 달리 시나리오 사업의 주체는 예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 활동에서 횔덜린의 질문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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