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장 가족의 전 부치기 [이종건의 함께 먹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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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짜장 팔십그램, 짜장분말 두 큰술, 돼지고기 삼백그램, (마늘, 감자, 다마내기) 4인분'.
가져갈 사람도 적으니 그날 먹을 만큼과 돌아가서 두어번 끓일 분량이 전부다.
명절이 싫어 가족과의 투쟁을 일삼던 세대가 농성장에서는 굳이 전 부치겠다며 용을 쓰는 것도 제법 볼 만하다.
다시 시작된 만두의 전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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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 | 옥바라지선교센터 활동가
‘중화짜장 팔십그램, 짜장분말 두 큰술, 돼지고기 삼백그램, (마늘, 감자, 다마내기) 4인분’. 친척 어르신 댁에 인사하러 갔더니 힘찬 글씨체로 적힌 조리법이 냉장고에 붙어 있었다. 가만 보니 주방일이 힘에 부친 할머님을 대신해 할아버님이 요리에 취미를 붙이고 계신 모양이다. 처음에는 ‘다마내기’가 담아내기를 잘못 적으셨는가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양파의 일본말이다.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었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다. 양파보다 다마네기가 익숙한 시절을 관통한 인생이지만 이제는 기꺼이 주방에서 팬을 잡는다. 여전한 것도 있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바뀌고 있는 것들도 있다. 우리의 명절은 그 한복판에서 늘 시험받는다.
한번 모이면 왁자지껄 잔칫날이었던 시절을 나도 기억한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본가는 늘 주먹만 한 만두를 빚곤 했다. 두부와 숙주를 많이 넣은 슴슴한 만두. 거기에 김치를 더해 넣는 것은 우리 집 방식이었다. 돼지 뼈를 넣고 푹 끓인 비지찌개와 ‘모찌’라 불리던 커다란 찹쌀떡까지. 어린 시절의 명절 풍경은 그랬다. 주방은 바쁘고, 먹는 사람도 바쁘다. 다 바쁘긴 한데 어딘가 왜곡된, 돌이켜보면 굴곡진 밥상이었다. 그 시절이라고 모든 것이 나쁘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괜찮다며 버티긴 어려운 문화다. 그렇게 수십년이 지났다. 모이는 사람도 적고, 해 먹는 것도 벅차다. 그나마 전이라도 사 먹던 과도기가 있었지만, 나중에는 아버지가 고기를 굽기 시작하며 전도 사라졌다. 굳이 찾아 먹을 시절도 아닌 것이다. 그러다가 올해부터는 어머니가 만두를 빚자고 하신다. 아버지에게는 추억이고, 어머니에게는 노동이었을 시절이건만 고기만 굽기는 영 아쉬우셨는지. 그마저 만두소는 다 준비해둬서 빚기만 했다. 가져갈 사람도 적으니 그날 먹을 만큼과 돌아가서 두어번 끓일 분량이 전부다. 그렇게 잠깐의 만두 퍼포먼스를 가지고 제법 명절다운 상을 차려 나눠 먹었다. 적은 수의 가족이지만, 좁은 주방에서 모두가 제 몫을 하고 있으니 제법 꽉 차는 폼도 난다. 두부, 숙주가 많이 들었고, 김치가 씹히는, 셋 중 하나는 터져 있는 만두. 늘 사진을 찍던 아버지는 어디서 보셨는지 이제 영상을 찍는다.
농성장에도 명절은 찾아온다. 명절과 농성장에서 드리는 예배 날짜가 겹치는 일도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본가 가는 걸 미뤄두고 꼭 농성장에서 예배를 드렸다. 철거민과 해고노동자, 갖은 사연의 농성장 인생에도 돌아갈 곳은 있다. 그렇다고 천막을 대신 지켜 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투쟁하는 이들의 명절은 외롭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예배를 고집했다. 그러고 나서는 평소 먹지도 않는 전을 부쳤다. 명절이 싫어 가족과의 투쟁을 일삼던 세대가 농성장에서는 굳이 전 부치겠다며 용을 쓰는 것도 제법 볼 만하다. 비법 반죽이라며 너스레 떠는 이, 재료 썰어 오는 이, 어설픈 실력으로 전을 부치는 이와 그걸 받아먹는 이들. 그렇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의 명절은 익어간다.
명분 없어 사라지는 것 사이로 다시 존재할 이유를 찾아 명맥을 잇는 문화도 있다. 분열된 세상, 삽시간에 바뀌는 문화 속에서도 서로를 연결하려는 본능은 그리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가족은 새 가족이 될 것이고 명절은 여전히 나름의 몫을 할 것이다. 다시 시작된 만두의 전통처럼. 할아버님의 짜장처럼.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농성장 가족의 어설픈 전을 닮은 모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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