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품을 쓰고 보고 만지며 깨닫는 것들

윤일희 2025. 2. 5.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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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에세이] <굿바이, 영자 씨> (박정애, 2024, 사람의무늬)

[윤일희 기자]

엄마가 영면한 후 당신이 남긴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은 막막했고 어려웠고 애달팠다. 가족 누구도 임종을 하지 못한 터라, 애통함과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책감까지 더해 심난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엄마가 살던 집을 비우기까지 시간이 좀 있었기에 약 한 달 정도를 잡고 엄마가 남긴 물건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정리라고 해봐야 결국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정하는 일이지만 그러고 싶었다.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세상 일이 어디 뜻대로 되던가. 뭐든 한달음에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언니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언니는 엄마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끄집어냈다. 정리가 아니라 마치 쓰레기 처리하듯 모든 물건을 다 버릴 작정인 양, 엄마의 물건이 커다란 종량제 봉투들에 담겨 내버려졌다. 이유는 하나, 죽은 사람의 물건은 상서롭지 못하니 버려야 한다는 것.

살다 죽었을 뿐인데 뭐가 부정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도 아닌 엄마의 죽음마저 결벽을 떠는 언니가 지겨웠다. 막지도 싸우지도 못한 채 한 일이라곤 그나마 쓰레기봉투에 던져지기 전 얼마의 유품이라도 챙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건진 것이 고작 낡디 낡은 수첩과 오래된 사진들, 옷가지 몇 벌 그리고 그릇 몇 개라니. 엄마의 85년이 무상했다. 엄마의 평생 흔적은 그렇게 사라졌다.

유품 정리랄 수 없는 그날의 일은 내게 꽤 큰 상흔를 남겼던 듯하다. 내 상처는 미술사학자 박정애의 '엄마 유품 정리 보고서' <굿바이, 영자씨>를 읽으며 조금 치유되었다. 그가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며 남긴 기록들을 보며 그가 행한 되새김이 내가 하고 싶었던 애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의 유품정리 보고서
 굿바이, 영자 씨 - 미술사학자의 엄마 유품 정리 보고서, 박정애(지은이)
"연구에 활용하는 자료는 모두 누군가의 유품"이라는 저자의 말은 너무나 당연했지만, 죽비처럼 내리 꽂혔다. 박물관이나 기념관 등에 전시된 기념적 물건들, 유물 혹은 기증품 일체는 누군가의 유품이었다. 내 엄마의 유품처럼 버려질 위기에서 누군가의 노력이나 행운으로 남겨진 것이다. 고귀한 사람의 유품이니 기려지는 것 아니겠냐 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보물로 지정된 왕족 귀족들의 유품 말고도 보는 이의 관심을 끄는 유품도 상당하다. 생각을 더듬어보면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에 소중히 보존된 보통 사람들의 유품도 많지 않은가. 많은 유품들이 떠오른다.

누군가 애지중지 길들여 사용했을 반짇고리나 문방구나 식기류, 옷과 장신구, 호미 낫 등의 농기구, 물고기를 잡는 어구 등 박물관이나 기념관 등의 전시실에서 마주친 물건들은 모두 누군가의 유품이었다. 저자의 말처럼, "모든 유품은 '헌 것'이다. 유품은 고인이 머물렀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땀과 눈물, 웃음의 스토리를 품고 있다."

나는 그날 겨우 건져온 엄마의 물건을 입고 쓴다. 엄마가 즐겨 입다 언젠가부터 입지 않던 조끼를 지금처럼 겨울이면 매일 걸쳐 입는다. 엄마가 김치를 지질 때 쓰던 큰 뚝배기에 나도 묵은지를 지져 먹는다. 엄마의 낯선 글씨가 쓰여진 수첩도 가끔 들여다본다.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가 태반이지만, 그냥 엄마의 글씨를 보는 게 좋다. 전쟁만 나지 않았다면 지주의 딸로 귀염 받고 공부도 많이 해 고작 남의 이름 등만 기록한 수첩 말고도 자신의 저서를 남겼을지도 모르는데, 큰 명운 앞에 개인의 운명은 초개같다.

보란 듯이 잘 살아보지 못한 한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종종 자신의 삶을 책으로 쓰라고 했다. 처음엔 농담인가 했는데 점점 진지하게 말하자 부담스러워져, 무슨 책을 쓰냐고 짜증을 냈더니 이후로 다시 말하지 않았다. 후회한다. 기록하는 것에 대한 가치나 기쁨에 무지했던 그때의 내가 한탄스럽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이듬해 가을 나는 뜬금없이 엄마의 고향인 철원을 찾아갔다. 철원 들머리에서 본 '두루미의 명소'라는 간판이 낯설었다. 엄마는 두루미 얘기는 하지 않았는데... 철원 큰 부자였다는 조부모님의 딸이었던 엄마의 어릴 적을 애써 상상하며, 그 아이가 먹고 자고 뛰어놀고 공부했을 어딘가를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엄마의 증언을 희미하게 붙잡고 둘러보아도, 엄마가 말하던 곳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굉장히 컸다는 기차역, 상점이나 음식점들이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었지만, 자꾸 속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부모님의 너르고 비옥한 전답과 큰 집, 친구들과 놀던 물 좋은 강과 학교는 어디쯤일까.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전에는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좀 다르다. 죽었지만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니다. 엄마가 돌아가셨어도 내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박정애는 이를 "죽음으로써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은 고인이 남긴 물건과 기억, 바로 유형 혹은 무형의 '유품'을 통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한다"고 했다. 내가 엄마의 유품을 입고 쓰고 만지며 엄마와 접속하는 순간들이 그렇다는 것 같아 위로가 되었다.

박정애의 <굿바이, 영자 씨>가 만약 그의 엄마가 베푼 끝도 없는 사랑에 무조건적인 감사와 사랑을 나열한 뻔한 사모곡이었다면 나는 완독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에 감사함과 동시에 가부장의 그늘을 벗어났더라면 다르게 빛났을 엄마의 삶을 애도했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저자의 보고서는 그의 말처럼 엄마 영자씨에 대한 '헌사'이기에 시종일관 다정했다. 문득 내게 엄마의 유품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유품정리 보고서를 쓰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그처럼 일관된 그리움과 사랑과 신뢰를 구구절절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내게 엄마는 저자의 엄마처럼 늘 인자하고 다정하고 헌신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화가 많았고 우울했고 아팠다. 엄마의 돌봄 없이 클 수 없었지만 나 역시 엄마를 돌보느라 힘들었다. 모성의 간헐적 붕괴와 돌봄의 역전은 관계를 해친다. 엄마를 사랑했지만 사랑만 할 수 없었던 나는 엄마를 향한 저자의 우아한 '헌사'에 어쩔 수 없이 자괴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자식 사랑이 어마어마했던 '영자씨'의 모성이 과잉 대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해보니 엄마 노릇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엄마의 유품을 쓰고 보고 만지며 엄마를 뒤늦게 이해한다. 유품의 쓰임새는 귀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게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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