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美 트럼프 시대, 길잃은 전세계 공중보건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5. 2. 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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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취임식. 연합뉴스 제공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시작되면서 세계가 긴장하며 주시하고 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영어 약자인 MAGA(마가)로 상징되는 미국 우선주의를 밀어붙이는 기세가 워낙 등등해 다들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과학이 관련된 분야도 마찬가지로 미국이 파리기후협약이나 세계보건기구를 탈퇴한다고 선언해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분위기다.

미국 대선 과정에서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는 일등 공신이었고 2기 행정부에서 정부효율부의 장관으로 지명돼 미국 과학기술정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기차 보조금 폐지나 화석연료 중시, AI 지원금 확대 등의 정책에서는 트럼프 측근들과 입장이 달라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반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지명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이하 케네디)는 오히려 트럼프 측과 코드가 더 잘 맞아 그의 뜻대로 보건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MAGA를 응용한 슬로건인 MAHA(마하), '미국을 다시 건강하게(Make America Healthy Again)'를 내놓았다.

문제는 이들의 생각이 주류 과학계 및 의학계와 다른 부분이 꽤 많아서 이들이 추진하는 정책이 미국인뿐 아니라 지구촌 사람들의 건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걱정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는 오래전부터 백신 음모론을 펼쳐왔다. 특히 코로나19 백신 개발과 접종 과정을 강하게 비판해왔다. 그의 저서 '백신의 배신' 한글판이 최근 출간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가 주도할 미국 보건 정책이 지구촌 건강에 미칠 영향을 살펴본다.

2021년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는 ‘진짜 앤서니 파우치’라는 책을 펴내 파우치와 빌 게이츠가 지구촌의 보건을 망쳤다고 강력히 비난했다. 음모론의 요소가 강한 이 책은 미국에서 100만 부 넘게 팔렸고 최근 ‘백신의 배신’이라는 제목의 한글판이 나왔다. 위키피디아 제공

● 파우치와 게이츠 악마화

'백신의 배신'은 운율을 맞춘 멋진 제목이지만 원서의 제목을 직역하면 '진짜 앤서니 파우치'이고 부제가 '빌 게이츠와 거대 제약회사, 민주주의와 공중보건에 대한 지구촌 전쟁'이다. 한마디로 파우치가 게이츠와 편을 먹고 권력을 남용해 미국뿐 아니라 지구촌 사람들의 건강을 망쳤다며 코로나19와 에이즈 등을 예를 들어 집요하게 주장하는 책이다.

앤서니 파우치는 미 국립알레르기및감염병연구소 소장이던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갈등하며 미국뿐 아니라 지구촌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

참고문헌이 2000여 개라는 '백신의 배신'을 좀 읽다가 포기했다. 숫자에 민감한 필자로서는 책의 내용을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케네디는 “백신이 출시되기 전인 2020년 내내 99.9%의 사람들은 자연 면역체계 덕분에 중증과 사망을 면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미국 인구 가운데 1억 명이 감염됐다면 0.1%인 10만 명이 중증이었다는 얘기인데 2020년 코로나19로 사망한 미국인만 50만 명이 넘는다.

혹시나 해서 에이즈를 다룬 부분도 좀 읽어봤는데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에이즈바이러스라고 부름)가 에이즈의 유일한 원인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게다가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에이즈 만연에 대해서도 사실은 에이즈가 아니라 기존 풍토병일 뿐이라며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지난해 학술지 '사이언스'는 2024년 과학성과로 특히 아프리카에서 구원이 될 HIV 예방 백신 개발을 선정했다. 이 책에 따르면 저명한 학술지가 사기극에 놀아난(또는 공모한) 셈이다.

파우치는 이 책에 대해 “불행한 작품”이라며 케네디를 “매우 불안정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파우치는 트럼프 행정부 때 그를 만나 백신에 대해 얘기한 뒤 “그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것 같지는 않다”고 회상했다.

● 조류독감 팬데믹 전환 위험성 커져

지난 미국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케네디는 지지율이 나오지 않자 사퇴하고 트럼프를 지지했고 그 결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지명돼 지난주 의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했다. 미국의 보건복지부는 예산이 무려 1조8000억 달러(약 2600조 원)에 이르고 미 국립보건원(NIH), 미 식품의약국(FDA),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를 관할한다. 한마디로 미국뿐 아니라 세계 보건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자리다.

'백신의 배신'에서 보여준 음모론적 시각을 지닌 사람이 수장 후보로 나섰으니 과학계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이언스'는 인사청문회 현장 기사를 실었는데 놀랍게도 케네디는 “백신을 지지한다”며 과거 자신의 주장에 대해 “내가 틀렸다고 말하는 데이터를 보여주면 주장을 고수하지 않겠다”며 “(백신을 맞지 않게) 사람들을 오도한 모든 진술에 대해 사과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단 청문회는 통과하고 보자는 속셈 아닐까 싶다.

케네디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NIH 직원 600을 자르는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혔다. 누구를 자를 것이냐는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새 행정부는 정치적으로 임명된 사람을 바꾸기 마련”이라는 원론적인 답을 했다. 그가 장관이 되면 NIH, FDA, CDC의 많은 전문가가 파우치 카르텔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백신 음모론자 등 비전문가가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미국의 보건 정책, 특히 감염병에 대한 정책의 방향이 크게 바뀔 것 같은 조짐이 이미 나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일련의 과학 회의를 취소시켰고 특히 최근 상황이 심각해지는 조류독감에 대해 CDC가 언급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이에 따라 CDC는 매주 발행하는 보고서를 건너뛰었고 그 결과 조류독감 발생 현황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됐다. 

조류독감바이러스의 변이가 속속 보고되고 있고 사망자도 나온 상황에서 이렇게 정보가 제한된다면 자칫 팬데믹으로 진행될 위험성이 커질 수 있다.

지난 2019년 11월 중국 우한에서 원인 모를 폐렴이 퍼졌을 때 한 의사가 바이러스를 검출했지만 보건당국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며 체포하는 어이없는 대응으로 결국 팬데믹으로 발전한(물론 제대로 대응했어도 팬데믹이 되는 걸 막지 못했을 수 있지만 요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황이 떠오른다.

● 만성질환과 마약엔 진심이지만...

그렇다고 케네디가 미국 보건복지부 수장이 되는 게 재앙인 것만은 아니다. 케네디는 환경 변호사로 활약했고 오늘날 미국인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 만성질환과 마약 만연 등의 배경을 강력하게 비난해왔다. 그가 백신 개발 등 감염병 연구예산을 대폭 줄이고 당뇨병 등 만성질환 연구예산을 크게 늘리겠다고 주장하는 맥락이다.

케네디는 생유(프랑스어로 lait cru) 옹호론자로 자신도 생유를 마신다고 한다. 생유는 멸균한 우유에 비해 영양이나 면역에 이점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병원체 감염 위험성이 크다. 실제 대부분 생유를 마신 20세기 초 미국의 식품 유래 감염의 4분의 1이 생유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미국에서 발생한 소의 조류독감도 소젖을 통해 퍼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위키피디아 제공

케네디는 미국 정부가 업계의 로비에 굴복해 여러 유해 화합물이나 초가공식품 등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해 오늘날 미국인의 건강이 엉망이 됐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그가 주장하는 건강 회복 방안 가운데 고개를 갸웃할 만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케네디는 생유(raw milk), 살균처리를 하지 않은 우유를 마셔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유를 살균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느 쪽이 건강에 좋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흥미롭게도 우유 살균 논란은 감염병과 만성질환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한 판단과 맥을 같이 한다. 후자라고 생각하는 케네디가 미살균을 옹호하는 건 일관성 있는 태도인 셈이다. 

우유 살균 여부가 만성질환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연구 결과를 보면 살균 우유를 마신 그룹이 생유를 마신 그룹에 비해 알레르기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살균 과정에서 우유에 함유된 면역 관련 단백질이 변형되면서 면역계가 과민해진 결과로 보인다. 

그럼에도 생유는 병원체에 오염될 위험성이 있고 실제 생유를 먹고 감염돼 사망에 이르는 사례가 발생한다. 지난해 미국에서 문제가 된 소의 조류독감도 소젖을 통해 감염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신임 보건복지부 장관인 케네디의 입김으로 규제가 느슨해져 생유 소비가 늘어나면 팬데믹의 위험성도 커지는 셈이다.

오늘날 지구촌의 많은 것들이 미중 두 나라가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가 기타 나라들의 몫인 형국이다. 따라서 두 나라의 협조 없이는(주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구촌의 웰빙을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어렵다. 

중국은 지난 10여 년 동안 환경 문제 해결에 큰 노력을 기울여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키는 부작용까지 낳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을 정도이지만(에어로졸 배출이 크게 줄며 지표에 도달하는 햇빛이 늘어서) 코로나19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언제든지 비상식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안타깝게도 이제 미국은 에너지, 환경, 보건 등 많은 분야에서 지구촌의 문제를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달리는 길로 확고히 접어든 것 같다.

'공유지의 비극' 이론에 따르면 미국이 이런 태도를 실천하면 다른 나라들도 따라가게 되고(나만 손해 볼 수는 없으므로) 그 결과 기후변화 등 지구촌 위기는 심화될 것이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인류의 이런 어리석음이 새로운 일도 아니라는 게 그나마 위안일까.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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