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토도 국민도 없지만 ‘전하’로 불린 지도자 아가 칸 별세
막대한 자금력으로 전 세계에서 자선 사업
어디를 가든 국가원수와 맞먹는 대우 받아
다스리는 영토나 국민은 없지만 국제사회에서 국가원수와 같은 대접을 받아 온 아가 칸(Aga Khan) 4세가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아가 칸은 이슬람교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로 세습직이다.

아가 칸은 1936년 스위스 제네바 인근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아가 칸 3세(1877∼1957)에 의해 아버지를 건너뛰어 이스마일파의 지도자로 선정됐다. 1957년 그가 아가 칸 4세로 공식 즉위했을 당시 겨우 21세로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교에서 건축과 디자인을 공부하는 대학생 신분이었다. 학업을 끝마친 그는 ‘아가 칸 개발 네트워크’로 불리는 자선 단체를 세우고 의료, 주택, 교육 및 농촌 개발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30개국 이상에서 운영되는 이 네트워크는 각종 비영리 활동에 연간 10억달러(약 1조4500억원)의 예산을 쓴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개발도상국 곳곳에서 아가 칸의 이름을 딴 자선 병원을 운영 중이다. 현지 경제 개발에 들인 금액도 수천만달러에 이른다.
아가 칸은 우리 돈으로 약 14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산과 1500만명 이상의 추종자를 거느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이스마일파의 교세가 매우 강력한데다 독특한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스마일파는 동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남아시아를 넘어 중동까지 퍼져 대규모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스마일파 신자들 사이에서는 소득의 최대 10%를 종파의 관리자인 아가 칸에게 헌납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로 여겨진다.

이슬람 문화와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개방성과 포용성을 강조했던 아가 칸은 오랫동안 무슬림과 서방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인물로 여겨져 왔다. 그는 2012년 언론 인터뷰에서 “부의 축적이 곧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신이 어느 개인에게 사회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나 행운을 주었다면 그와 동시에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도 부과된다는 것이 바로 이슬람 윤리”라고 말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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