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가 있는 삶] 기타오케스트라 단장 리여석 | 전원생활
이 기사는 월간 ‘전원생활’ 2월호 기사입니다.
여섯 개의 현을 튕겨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타. 기타로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구현하는 데에 삶의 대부분을 썼다. ‘기타오케스트라’라는 새로운 지평을 연 리여석 단장을 만났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금방이라도 눈을 쏟아낼 듯한 오후, 경인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기타오케스트라 단장 리여석(본명 이은철, 85)을 만나기 위해 인천으로 가는 길이다. 차 안 라디오에서는 기타 연주곡이 흘러나온다. 깊고 부드러운 기타 소리가 쓸쓸한 시공간을 위로한다. 세다, 여리다, 떨리다, 멈추는 기타 소리는 가만가만 말하는 사람의 말소리를 닮았다.
리여석은 1971년 기타오케스트라를 창단한 단장 겸 지휘자이다.(현재는 아내인 조예진 기타리스트가 단장을 맡고 있다.) 기타로 이뤄진 오케스트라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였다. 오케스트라라고 하면 바이올린이나 첼로 등으로 구성된 현악오케스트라나 관악기로 이뤄진 윈드오케스트라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 가운데 ‘기타’로만 오케스트라를 한다는 건 다소 무모해 보이는 도전이었다. 리여석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 오래되고 끈질긴 의심을 딛고 무대에 올랐다.
“국어 교사로 부임했더니 음악도 가르치라는 거예요. 학교에 교사가 부족하던 시절이었어요. 국어 교사가 음악도 가르치고, 수학 교사는 과학도 담당하는 식이었죠. 인천 부평여중으로 옮기고서는 교장선생님 지시로 기타반을 만들게 되었어요.”1971년, 리여석기타오케스트라의 전신인 ‘카르카시고전기타합주단’이 만들어졌다. ‘기타 좀 치는 선생님’으로 소문 난 덕분에 기타반을 맡았지만, 기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차가웠다.
‘통기타와 포크 음악’으로 대표되는 반항적인 이미지 때문에 학부모의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교육 현장에서 가요를 가르칠 수 없으니 연주곡을 시도했어요. 학생들이 모두 독주를 하면 재미가 없어서 파트를 나누게 되었고요. 1년쯤 열심히 하니 곡이 되더군요.”리여석은 기타반 지도를 단순히 취미나 가욋일 정도로 여기지 않고 열과 성을 다했다.
화성학과 편곡 등 음악이론을 독학으로 공부하고, 기타 합주에 적합한 곡을 골라 직접 편곡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무려 450여 곡을 편곡했다. 지휘법은 독학이 쉽지 않아 그의 친구이자 인천시립교향악단 지휘자였던 김중석에게 배웠다. 합주단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경기중고등학교 음악콩쿠르 현악부’에 출전해 현악합주 우승 3회를 거머쥐는 등 전국 콩쿠르 대회를 휩쓸었고, 당시 유명 TV 프로그램에도 10회 이상 출연했다. 색안경을 끼고 보던 학부모들도 호의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선생인 제가 맨날 공부하고 미쳐 있으니까 학생들이 안 할 수가 있나요? 그런데 저는 처음부터 없던 것을 해보려고 도전적으로 시작했어요. 욕을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욕을 먹어요. 허허.”
“오케스트라라고 하면 보통 무대에 20~30명이 올라가요. 숫자보다는 악기 편성이 중요해요. 가령 현악합주를 하려면 고음을 내는 바이올린, 중음을 내는 비올라, 저음을 내는 첼로, 그리고 가장 낮은 소리를 내는 콘트라베이스 같은 게 갖춰져야 해요. 그와 마찬가지로 기타도 아주 고음용 기타가 있고, 무척 낮은 소리 내는 기타도 있어요. 그런데 그때 우리는 ‘프라임’이라고 하는 표준형 기타로만 연주하니 폭넓은 음역대를 소화하는 데 한계가 있었죠. 그래서 몇 번이나 일본에 가서 세분화된 음역을 담당하는 기타들을 구해왔어요.”
일본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미 표준형 기타를 개량한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 콘트라베이스, 기타론, 프라임 쳄발로 등 다양한 기타가 사용되고 있었다.
리여석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알토와 베이스 이외에, 콘트라베이스 기타를 합주 편성에 추가했다. 또한 일본에 오가는 동안 세계적으로 유명한 니이보리기타오케스트라와도 인연이 닿았다. 니이보리기타오케스트라와 교류하며 기타오케스트라의 편성과 프로그램을 더욱 체계화했다.
그때쯤 그는 국어 교사 일을 그만두고 오케스트라 일에만 매진하기에 이른다. 국어학자가 꿈이었고, 국어 교사가 본업이었던 그가 어째서 그렇게 기타오케스트라에 빠져들게 되었을까?
“기타 소리만큼 좋은 게 없어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온종일 쳐도 기타 소리는 싫증이 안 나요. 소리가 오버되지 않고 항상 단정하게 깔리거든요.”
대표적으로 1998년 일본 국민문화제 실내악 부문에 아시아 대표로 초청되어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이때의 공연을 계기로 일본 사가기타앙상블(현 라에스페란사기타앙상블)과 교류를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난 10월 부천에서 열린 53회 정기연주회에서도 라에스페란사기타앙상블의 지휘자 세키야 세이지가 공연의 상당 부분 지휘를 맡아주었다.
“작년에 갑자기 허리에 염증이 생겨서 수술하게 됐어요. 꼼짝도 못 하는데, 이미 약속해둔 공연을 취소할 수도 없어서 난감했죠. 다행히 세키야 세이지가 흔쾌히 공연을 진행해줬어요.”
어느새 리여석 옆으로 다가온 그의 아내이자 음악적 파트너인 조 단장이 말을 보탠다.
“악보 그리느라 밤낮없이 구부리고 있으니 병이 났지요. 수술 후엔 살이 빠져서 몸무게가 40㎏대까지 떨어졌어요. 그런데도 휠체어를 타고 그날 공연을 마쳤어요.”남편 리여석을 보는 조 단장의 눈빛에 걱정과 존경이 차례차례 지나간다.
그 눈빛을 모른 체 할 수 없어 서둘러 마지막 질문을 꺼낸다. 반세기 넘도록 기타와 함께한 리여석의 ‘인생곡’은 무엇일까?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에요. 스페인의 유명한 기타 연주곡이죠. 또 슈베르트의 ‘밤과 꿈’도 좋아합니다. 음악감상 앱에 저희 앨범이 올라가 있으니 들어보세요.”
글 길다래 기자, 사진 고승범(사진가), 리여석 제공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