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길엔 ‘지뢰’ 늘고 바닷길엔 안전지대 없더라
하늘길·바닷길의 목격자들(4)
“팬팬(메이데이 전 단계 비상 신호), 터뷸런스(난기류) 발생.”
지난해 8월 중국 허베이성 상공을 날던 국내 ㄱ사 민항기가 관제탑에 긴급 비상 신호를 보냈다. 해당 기체는 10㎞ 상공에서 강한 난기류를 만나 심하게 흔들리며 100m가량을 급강하했다. 일부 승객이 천장에 머리를 찧고 식판과 담요 같은 물품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지난해 12월13일 서울 김포공항에서 만난 30년차 경력의 베테랑 임아무개 기장은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기체를 빨리 정상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본능 뒤엔, 심하게 흔들리는 기체 안 승객이 다칠 수 있겠단 걱정과, 폭우를 피하는 항로 변경 승인을 안 해준 중국 관제당국에 대한 원망이 교차했다. 다행히 빠르게 고도를 회복해 10여명의 경미한 부상자만 발생했지만, 그날 기억은 임 기장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30년차 민항기 기장의 경험 “최근 청천난류 늘어”
그에게 중국 북동부 상공은 수없이 다닌 익숙한 항로였다. “바다를 끼고 있어 폭우 등 기상이 급변하는 동남아나 태평양보다는,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비나 기상 변화가 적은 중국 항로가 무난한 코스”라고 임 기장은 설명했다. 하지만 평소라면 가뭄이 이어질 시기인 8월 초인데도, 그날 허베이성 상공엔 태풍을 동반한 강한 물 폭탄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 한반도에 폭염을 일으킨 남쪽 기단 세력이 이례적으로 중국 북동부까지 밀고 올라가 기록적인 비를 뿌린 것이다.
“경험한 적 없는 상황이라 중국 관제당국에 폭우를 피하는 항로 변경을 요청했어요. 중국 쪽 절차가 까다롭고, 다른 비행기도 해당 항로를 오가는 데 문제가 없었단 이유로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죠. 여객기에 설치된 최첨단 기상 관측 레이더와 실시간 예보 데이터도 예상치 못한 난기류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기장들은 통상 구름으로 기류 흐름을 파악한다. “게릴라성 호우 같은 변덕스러운 기상 상황이 발생하는 곳엔 수직으로 길게 뭉친 ‘적란운’이 발생합니다. 대기가 뜨거울수록 적란운이 더 길고 크게 나타나고 적란운 내부 소용돌이 강도도 강해져요. 운항 중 이런 구름 뭉치가 보이면 긴장하고 무조건 피합니다.” 하지만 최근 나타나는 ‘청천난류’는 구름 없는 맑은 하늘에 나타난다. 맨눈이나 레이더로 파악할 수 없어 더 위험하다. 기장들은 이런 난기류를 ‘하늘길 지뢰’라 부른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기후변화 때문에 하늘길에 더 강력하고 많은 지뢰가 깔리고 있어요.”
청천난류는 항공기들이 비행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뒷바람’으로 활용하는 ‘제트기류’ 주변에서 많이 발생한다. 지구 기온이 높아질수록 수증기와 상승기류가 늘면서 제트기류의 흐름도 어긋나는데, 그 과정에서 청천난류도 늘어난다. 영국 레딩대학교 폴 윌리엄스 교수 연구팀 조사에서 북대서양과 미국 노선에서 심각한 난기류가 발생한 시간은 1979년 17.7시간에서 2020년 27.4시간으로 54.8% 늘었다. 중강도 난기류 발생 시간도 37%(70→96.1시간) 늘었다. 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 연구팀은 1970~2014년보다 2056~2100년에 난기류가 약 2배(고탄소 시나리오의 경우) 자주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늘길 위험은 갈수록 모든 계절로 퍼져간다. 임 기장은 지난해 4월 폭우로 사막인 두바이공항의 활주로가 물에 잠기고, 지난해 11월 한국의 가을 폭설로 항공기 수백편이 결항된 사례를 들었다. 겨울과 봄철 철새 떼의 동선이 불규칙해진 것도 기후변화 영향이다.
“오랜 기간 축적한 비행 경험들이 모두 빗나가고 있습니다. 점점 심해지는 하늘길의 이상기후를 직접 목격한다면, 첨단 기술과 인간의 기지만으로 이를 극복한다는 게 오만한 생각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27년차 상선 선장의 체험 “처음 만난 태풍의 눈”
5만~7만톤급 국제 상선을 운항하는 변상수(46) 선장은 지난해 여름(6~9월) 멕시코만에서 다섯차례 역대급 허리케인을 만났다. 심지어 최고 강도 5등급 허리케인 ‘베릴’이 발생했을 때 선장의 배가 태풍의 눈을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기상관측 역사상 최악의 허리케인들이 몰아친 괴물 같은 바다를 경험한 변 선장에게 기후변화는 ‘생존의 위협’이었다.
지난달 11일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만난 변 선장은 27년간 배를 타왔지만 “선박이 태풍의 눈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선박 운항 과정에서 수많은 기상 데이터를 참고하고, 지역별 관제센터 등과 소통하며 운항 동선을 결정하기 때문에 허리케인을 정면으로 맞닥뜨릴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했다.
“지난해 6월 말 원유 운송을 위해 멕시코만 베라크루스항 인근을 이동 중일 때였어요. 북대서양에서 생겨난 열대성 폭풍(허리케인의 직전 단계)이 멕시코만 쪽으로 이동할 거란 데이터를 접했습니다. 초여름 낮은 해수 온도로 강한 허리케인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작아 경로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관제사 의견 등을 반영해 계획대로 운항했어요. 그런데 하룻밤 사이 폭풍이 5등급 허리케인으로 발달해 카리브해 연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겁니다.”
시속 50㎞(최대 풍속 200㎞)의 허리케인을 30㎞ 속도의 배가 피하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허리케인의 영향권에 들자 10m가 넘는 파고가 갑판을 덮쳤고, 대형 크레인이 쓰러질 정도인 시속 180㎞의 바람이 몰아쳤다. 20여명의 선원은 갑판이 휘어질 정도의 파도와 바람에 배가 좌초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러다 어느새 30분가량 고요함(태풍의 눈)이 이어졌고, 다행히 그 시점에 대륙권 기압을 만난 허리케인의 강도가 2등급으로 줄면서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태풍의 눈을 지난 뒤에도 허리케인의 강도가 유지됐다면 선박 침몰과 기름 유출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이전과 전혀 다른 바다를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허리케인 베릴도 이전 같으면 바로 열대성 폭풍으로 소멸했을 겁니다. 보통 6월 말~7월 초 사이엔 대서양 수온이 높지 않아서 4등급 이상으로 강한 허리케인이 될 가능성이 적은데, 지구온난화가 슈퍼폭풍 발생 시기를 앞당긴 거예요. 바다가 전보다 예측이 어려워졌고 대비가 어려우니 피해가 클 수밖에 없어요.”
베릴은 초여름인 6월 말 발생한 가장 강력한 허리케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은 초여름인 6월 말 해수면 온도가 이미 한여름을 지난 9월 수준으로 오르면서 폭풍에 막대한 에너지를 공급한 게 원인이라고 봤다. 지난해 멕시코만엔 초여름 기상이변이 부른 5등급 허리케인에 이어 프랜신(2등급), 헐린(4등급), 밀턴(5등급), 라파엘(3등급) 등의 강력한 허리케인들이 불어닥쳤다. 멕시코만 일대에서만 350명의 사망자와 1820억달러(약 268조원)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변 선장은 기후변화로 인한 선박 운항의 어려움이 우리 일상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지난해 허리케인 밀턴이 멕시코만을 관통했을 때 미국 서부 텍사스산 원유 가격이 4% 가까이 급등한 사례를 들었다.
“태풍 경로를 피해 수백㎞ 항로를 돌아가면 그만큼 운항 비용이 늘어나요. 선박이 며칠간 멈춰 있어야 할 땐 배를 운항하는 선주와 물건을 맡긴 화주의 비용이 모두 급증하고요. 선장 입장에선 험난한 항로를 선택해 운항 비용을 줄일지 매 순간 고민합니다. 글로벌 시대 바닷길이 막히면 그 추가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 모두에게 돌아갑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안전지대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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