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빈 업어 키운 왕언니의 눈물, 韓 탁구 살린 10년 세월 '감동의 은퇴식'
한국 탁구를 위해 헌신했던 왕년의 여자팀 에이스와 띠동갑 동생이자 현재의 에이스가 의미 있는 마지막 국제 대회 대결을 펼쳤다. 언니는 선수 생활의 후반기를 화려하게 마무리했고, 동생은 더 한층 성장해 창창한 미래를 기대하게 됐다.
현재 한국 탁구의 아이콘인 신유빈(21·대한항공)과 10년 넘게 대표팀 주축으로 활약해온 전지희다. 둘은 3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월드테이블테니스(WTT) 시리즈 2025 싱가포르 스매시 여자 단식 1회전에서 맞붙었다.
신유빈의 3 대 0(11-8 11-6 11-7) 완승이었다. 애초 전지희는 지난해 11월 혼성단체 월드컵 이후 태극 마크를 반납한 상황이었다. 이번 대회에 나설 계획이 없어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한 가운데 WTT의 특별 초청으로 참석한 것이었다.
전지희도 1게임을 팽팽히 맞서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였다. 신유빈과 팽팽한 드라이브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다만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만큼 둘은 웃으면서 즐겁게 경기를 펼쳤다.
승패가 갈렸지만 둘의 얼굴에는 모두 미소가 번졌다. 신유빈은 전지희에게 다가가 서로 껴안았고, 이후에도 하트 포즈를 취하며 특별한 추억을 남겼다.
WTT 사무국의 깜짝 이벤트도 진행됐다. WTT 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치른 전지희의 은퇴식이었다. 전지희와 지난해 파리올림픽 여자 단체전 동메달을 합작한 신유빈, 이은혜(대한항공)는 물론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등을 함께 했던 맏언니 서효원(한국마사회), 주세혁 대한항공 감독도 자리했다.
전지희는 "올해는 출전 계획이 없었는데 특별한 초대를 해줘 기뻤다"면서 "(신)유빈과 경기는 정말 짜릿했고, 유빈과 마지막 경기를 치러 특별하게 느껴졌다"며 벅찬 눈물을 보였다. 신유빈도 "정말 최고의 파트너를 만나지 않았나 싶고, 앞으로 (내게) 이런 행운이 따라올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서 "(언니가) 나를 거의 키웠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고 화답했다.
중국 허베이성 랑팡 출신 전지희는 중국 청소년 대표로 2007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 단식에서 준우승을 거두는 등 유망주로 꼽혔다. 그러나 중국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한 가운데 2008년 김형석 현 화성시청 총감독의 눈에 띄어 한국으로 왔다. 2011년 귀화한 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부터 10년 넘게 태극 마크를 달고 활약했다.
다만 고대했던 올림픽 메달까지는 쉽지 않은 길이었다. 리우올림픽에서 노 메달에 그친 전지희는 2021년 도쿄 대회에도 신유빈과 나섰지만 역시 수확을 얻지 못했다. 2번의 아시안게임에서도 동메달에만 머물며 중국, 일본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30살을 넘으며 서서히 은퇴를 생각해야 할 시점. 전지희는 영혼의 단짝을 만났다. 5살 때부터 탁구 신동으로 주목을 받으며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 등 잠재력을 보이고 있던 12살 어린 신유빈이었다. 한국 탁구의 미래를 키워줄 적임자로 전지희가 낙점된 것. 특히 전지희의 노련함과 신유빈의 패기, 각각 포핸드와 백핸드의 장점, 왼손과 오른손의 조화를 보이면서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했다.
2023년 열린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전지희는 신유빈과 함께 2002년 부산 대회 이후 한국 탁구에 21년 만의 복식 금메달을 안겼다. 그러더니 지난해 파리올림픽에서는 16년 만의 여자 단체전 메달(동)을 따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올림픽 메달과 아시안게임 금메달이었다.
전지희와 신유빈은 전설의 복식 듀오도 소환했다. 202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복식 결승에 진출했는데 한국 선수로는 양영자-현정화(한국마사회 감독) 이후 36년 만이었다. 양영자-현정화는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 복식 금메달을 합작한 레전드다.
결국 전지희는 올림픽 동메달,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비롯해 아시안게임 금메달, 동메달 5개, 아시아선수권 금메달 1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 등 역대 귀화 선수 최고 성적을 냈다. 신유빈도 파리올림픽 혼합 복식에서 임종훈(한국거래소)과 동메달을 따냈다. 전지희의 든든한 리드 속에 복식에서 더 빨리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었던 셈이다.
만약 전지희가 귀화하지 않고, 신유빈을 만나지 못했다면 한을 남긴 채 선수 생활을 마감할 가능성이 높았다. 신유빈 역시 본인의 말처럼 최고의 파트너인 전지희가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결실을 거두기가 쉽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야말로 영혼의 짝궁이었다.
특히 전지희는 중국에서 귀화해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유예 기간이 있어 다른 국가대표들보다 뒤늦게 국제 대회를 뛰어야 하는 등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다. 전지희를 지도했던 김형석 감독은 "포스코에너지 시절 세계 랭킹 포인트를 따기 위해 거의 지구를 10바퀴 돌 만큼 힘든 과정을 겪었다"면서 "둘이 서로 싸우고 울기도 많이 했다"고 돌아보기도 했다.
전지희는 도쿄올림픽 당시 취재진과 만나 "리우에 이어서 이번에도 8강에서 탈락했다"면서 "꼭 4강에 오르고 싶었는데 마음이 너무 힘들다"며 눈물을 보였다. 대회 중 중국 네티즌들이 "전지희가 성형 수술을 하려고 한국에 갔느냐"는 등의 비난이 일기도 했다. 이에 전지희는 "하하하. 많은 분이 글을 남겨주셔서 화제의 검색어가 됐다"고 하하 웃으면서 "쌍꺼풀 수술에 한국 돈으로 77만 원 줬다"며 의연하게 넘겼다.
다만 전지희는 당시 차기 올림픽에 대해 "나이도 있기 때문에 대회 끝나고 생각해보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당당히 30살이 넘은 나이를 극복하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까지 훌륭하게 치르고, 최고의 은퇴식 선물을 받았다. 그런 언니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축하해준 신유빈도 전지희가 남긴 유산을 통해 자신의 길을 더욱 확실하게 개척해나갈 힘을 얻게 됐다.
CBS노컷뉴스 임종률 기자 airjr@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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