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45] 亂世(난세)가 스승이다
서른아홉 살 무렵이었다. 목숨을 걸고, ‘어떤 일’을 해내야 했다. 내 인생을 구조(救助)하고 싶었고, 문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숨어 지내던 나는, 존재가 소등(消燈)된 사람이었다. 파괴된 자존감을 재건해 다시금 세상에 나아가고 싶었다.
나는 먼 지방의 한 숙박업소에서 마시면 절대 해독(解毒)이 불가능한 농약병(農藥甁)을 앞에 두고, ‘어떤 것’을 완성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었다. 나는 죽을 각오가 뭔지 안다. 그건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계속 이대로 살아야만 한다면,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내게 타인의 아픔이나 절망을 이해하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착각한다면, 그건 내가 그 시기에 스스로 나를 설득하고 독려하면서 경험한 투병기(鬪病記) 때문이지 내 유전자 때문이 아니다.
어쨌거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 ‘어떤 일’과 그 ‘어떤 것’을 돌파해낸 덕분으로 아직도 살아서 작건 크건 또 다른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 여전히 삶은 어렵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 국내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한낮 공항 야외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데, 내가 죽지 않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 마구 눈물이 터져 나왔던 기억이 선하다.
한데, 정말 기이한 일이 그 며칠 뒤에 있었다. 좋은 결과의 확정까지 통보받은 밤, 편의점 앞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데, 문득, 차들이 총알처럼 달리고 있는 어두운 4차선 도로 속으로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마치 당연히 그래야 된다는 것처럼 드는 게 아닌가. 맨정신에 말이다. 너무 놀란 나는,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려 죽음을 피해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제 몸과 영혼의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갈망을 성취한 사람이 이윽고 긴장이 풀리면 야릇한 슬픔에 최면 걸린 듯 그럴 수도 있는가 싶었다. 다만 그 체험을 통해서 나는, ‘인간에 대해 아는 체해서는 안 된다.’는 작가적 신조(信條)를 얻었다. 그걸 명심해야 인간과 세상에 대해 제대로 된 것을 쓸 수 있다.
지난 한 달간 휘몰아치는 난세에 시달리면서, 나는 서른아홉 살 그 밤의 깨달음을 되새겼다. 내 작가적 신조에 소홀했음을 반성했다. 난세에는 인간의 온갖 본색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없던 것들이 생겨나는 게 아니라, 숨겨져 있던 것들이 드러난다. 요즘 같은 난세가 따로 있는 거라고 판단한다면 헛똑똑이다. 기실 세상은 ‘항상’ 난세이며 그 감각을 잃지 않는 게 지혜다. 인간들은 ‘싹 다’ 수수께끼인데 서로를 안다고 믿었던 오만이 오싹하다. 난세는 악인을 발견하는 시절이 아니다. 가짜들과 기회주의자들이 확인되는 시절이다. 난세가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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