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하게 화려하게… ‘동양 앤디 워홀’이 보낸 초대장

박동미 기자 2025. 2. 3. 09:2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日 팝아트 거장 故 케이이치 타나아미 첫 한국 개인전
‘백 개의 다리’ 포함 700여점
요괴·뱀 여인 등 관람객 맞이
전쟁·투병 겪으며 본 환상 투영
장르·국경·시공간 넘나드는
생전의 독창적 작품세계 주목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케이이치 타나아미 특별전’에서 관람객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전시관 4층에서는 조각 ‘기상천외한 몸’(가운데 정면)을 비롯해 만화가 후지오 아카쓰카와의 협업 작품 등 타나아미 예술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최신작이 소개된다. 대림미술관 제공

아시아의 팝아트 작가라고 하면, ‘스마일 플라워’ 시리즈로 유명한 무라카미 다카시부터 떠오른다. 루이비통 등과 협업하며 순수미술과 상업미술 경계 없이 활약하는 다카시는 최근 뉴진스의 앨범 표지와 콘셉트를 디자인하며 더욱 인지도를 높였다. 그런데, 다카시보다 앞서간, 그리고 다카시에게 영향을 끼친 일본 팝아트 선구자가 있으니, ‘동양의 앤디 워홀’이라 불렸던 ‘케이이치 타나아미’(1936∼2024)다. 지난해 세상을 뜬 타나아미의 예술 세계가 드디어 한국에 상륙했다. 서울 종로구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타나아미의 첫 한국 개인전 ‘아임 디 오리진(I’m the Origin)’으로 작가의 60년 창작 여정에서 주요한 70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어서 오세요, ‘타나아미 월드’에 = 국내 젊은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팝아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시점에서, 타나아미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는 것은 시의적절해 보인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관심이 있다면 더욱 흥미로운 전시다. 다카시와 요시모토 나라로 대표되는 ‘슈퍼 플랫’ 미술운동을 가장 앞서 이끈 주인공이 타나아미이기 때문이다. 슈퍼 플랫 운동은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영향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사조다.

전시장 초입에서 관람객들은 어두운 조명 속 다리를 형상화한 거대한 크기의 설치물 ‘백 개의 다리(A Hundred Bridges)’(2024)를 만나고, 동명의 병풍 콜라주와 마주하게 된다. 가만 들여다보면 이 다리 설치물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튀어 오른다. 전투기, 조종사, 목이 긴 요괴, 뱀 여인, 수탉, 잉어 등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다리 위에서 움직인다. 병풍 위에도 같은 이미지들이 등장하는데, 여기엔 작가가 경험한 태평양전쟁 당시의 도쿄대공습이 투영됐다. 즉, ‘다리’는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 또 다른 만남의 장소다. 생애 거의 마지막에 완성된 작품이라 그 의미가 더욱 와 닿는데, 관람객들은 이 다리를 통해 현실의 문을 열고 나와, 타나아미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1986년 작 ‘통로(passage)’ ⓒKeiichi Tanaami Courtesy of NANZUKA

◇고통과 슬픔으로 쌓아 올린 경쾌한 예술세계…전쟁과 투병 기억을 주제로 = 타나아미의 평생 신념은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1960년대 앤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 등 팝아트 작가들에게 영감을 받았고, 일본에 유입된 미국 대중문화를 기반으로 회화, 조각, 설치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현란한 색감과 경쾌한 디자인을 선호했지만, 이는 고통과 슬픈 기억을 승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가족과 함께 피란을 떠나던 모습, 1980년대 결핵으로 입원했을 당시 생사의 경계에서 본 환각을 팝아트로 풀어내는 식이다.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모티브 등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결핵 투병 이후로, 그는 이때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정리하고 전업 작가로 전향한다.

그의 작업 철학은 세계 미술계에 자신을 제대로 각인시킨 ‘노 모어 워(NO MORE WAR)’ 시리즈에서 출발한다. 이번 전시의 두 번째 공간에서 이를 만날 수 있는데, 그는 아방가르드 매거진(Avant-Garde)이 주최한 반전 포스터 콘테스트에서 이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고, 일본의 팝아트를 세계 시장에 알리는 데도 기여했다. 전시장 2층에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된 ‘노 모어 워’ 시리즈(1967)를 본 후, 3층으로 올라가 투병 이후 꿈·환각·환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들과 드로잉 시리즈, 2020년 이후 팬데믹 당시 몰두했던 피카소 시리즈 등까지 감상하고 나면, 어느새 타나아미 유니버스에 푹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통과 슬픔의 정신세계를 화려하고 경쾌한 3차원 공간으로 치환시키는 타나아미 예술의 미덕. 그 우주 속이 더 궁금해진다.

◇타나아미의 또 다른 서랍…독창적 세계를 심화한 협업 작품 = 이번 전시는 제목에서부터 독창성을 강조했다. 그 정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이 4층 공간인데, 여기에선 기괴한 모양의 생물을 혼합해 생명력 넘치는 조각상을 묘사한 ‘기상천외한 몸’(2019)이 기다린다. 장르와 국경, 매체와 시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해 온 타나아미 예술 세계가 조각 그 자체로 구현된 느낌이다. 여기에, ‘거울 속의 내 얼굴’과 ‘기억의 미로’는 만화가 후지오 아카쓰카와 협업한 것으로 2022년에 완성한 비교적 최신작이다. 캔버스 위 빈틈없이 상징물이 들어찬 포스터와 팝아트 작품에 압도돼 다소 지치더라도 끈기를 갖고 4층까지 견디기를 권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울림이 커지는 전시다.

대림미술관 역대 최대 규모인 이번 전시는 전시관 옆 별관 ‘미술관 옆집’도 활용했다. 아디다스, 유니클로 등 브랜드와 협업하며 다양한 제품을 탄생시켰던 ‘이미지 디렉터’ 타나아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작업 인생이 내내 그러했듯, 전시 방식도 도전적이다. 오는 6월 29일까지. 입장료는 1만5000원.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