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수 없는 비밀', 도경수 앞에 놓여진 원작의 높은 허들

아이즈 ize 정시우(칼럼니스트) 2025. 2. 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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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정시우(칼럼니스트)

'사진= ㈜하이브미디어코프

배우들은 말한다. 멜로를 하고 싶어도 시나리오가 없다고. 투자 제작자는 말한다. 멜로는 만들어봐야 본전 찾기 힘들다고. 관객들은 말한다. 지갑을 열 만한 한국 멜로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충무로에서 멜로는 대세와는 거리가 먼 장르라는 사실.   
 
멜로 기근 현상이 항상 있었던 건 아니다. 190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엔 멜로가 하나의 인기 장르로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다. '접속'(1997) '편지'(1997)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동감'(2000), '엽기적인 그녀'(2001) '클래식'(2003),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너는 내 운명'(2005) 과 같이, 그때 그 시절 우리를 울린 멜로 영화는 수두룩하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멜로 영화의 위상은 급속도로 쪼그라들었다. 2012년에 '건축학개론'과 '늑대소년'이 흥행에 성공하며 잠시 훈풍을 드리웠지만 바람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한국 멜로 영화가 주춤한 사이, 그 빈자리를 빠르게 메운 건 '중화권 청춘 영화'들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2008), '청설'(2009),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1), '나의 소녀시대'(2015) 등이 꾸준히 사랑받으며 멜로 영화에 대한 수요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왜 한국은 싱그러운 청춘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튀어나온 것도 이맘쯤이다. 

흥미로운 건, 이제부터. 최근 충무로가, 10여 년 한국에서 인기를 끈 중화권 영화 리메이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현상이다. 지난해 동명의 대만 영화를 리메이크한 홍경-노윤서 주연의 '청설'이 관객을 만난 데 이어, 올해엔 도경수-원진아의 '말할 수 없는 비밀', 진영-다현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그 바통을 이어받는(았)다. 

사진= ㈜하이브미디어코프

허광한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해 낸 '상견니' 역시 '너의 시간 속으로'(안효섭, 전여빈, 강훈 주연)라는 제목으로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바 있는데, 이러한 흐름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독창적인 시나리오 찾기가 힘들어진(혹은 그런 시나리오에 과감히 투자하기 주저하는) 시장에서, 검증된 콘텐츠로 승부하는 게 안전하다고 믿는 제작자와 투자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검증받은 콘텐츠라는 것이 흥행에 꼭 유리한 건 아니다. 막강한 비교 대상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독'일 될 수도 있는 게 리메이크다. 이번 설 연휴 개봉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바로 이러한 사례에 해당된다. 주걸륜-계륜미가 주연했던 2008년 동명 영화는 어둠의 경로(불법 복제 파일)를 통해 미리 본 관객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타며 마니아를 양산한 작품이다. 소규모로 개봉해 4개월 만에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대만 청춘 영화 상륙에 기폭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충성도 높은 팬을 많이 보유한 작품인 만큼, 리메이크 허들이 높은 도전일 수밖에 없다. 

한국화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중반까지는 원작의 구성을 크게 비틀지 않고 따라간다. 비밀의 악보와 음악실 내 피아노가 시간 여행의 매개가 된다는 점, '타임슬립 후 처음 눈이 맞추진 사람만 시간 여행자를 볼 수 있다'는 설정, 과거로 돌아갈 땐 피아노를 빠르게 쳐야 한다는 규정 등이 고스란히 이식했다. 

반면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의 나이대를 대학생으로 옮기면서 주요 무대가 대학 캠퍼스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변화를 매력적으로 활용하지는 못한다. 서구 양식의 교정이 신비감을 자아냈던 원작(영화 개봉 후 여행지로 유명세를 탔다)과 비교하면 별다른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대학가 음대 건물(시멘트 건물)은 건조하게만 느껴진다. 멜로드라마적 뉘앙스를 품었던 두 남녀가 자전거를 탄 풍경과 여주인공 집 앞 풍경도 리메이크 과정에서 밋밋해졌다. 로케이션과 미술이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물이다.

사진= ㈜하이브미디어코프

원작에서 멜로만큼이나 강력한 치트키로 꼽혔던 피아노 배틀도 심심하다. 피아노 선율이 하나의 역동적인 액션으로 기능하며 긴장감을 조성했던 원작을 상기했을 때, 한국 버전에서의 피아노 배틀에선 연출자의 비전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배틀이여, 피아노 연습이여? 배틀에 합당한 형식을 갖춘, 조금 더 적극적인 연출 디렉팅이 있었어야 했다. 

첫사랑이 소재인 영화의 성패는 사랑에 눈 떠나가는 과정에서의 설렘과 떨림을 얼마나 잘 포착하는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작에는 있지만, 리메이크된 한국판에는 없는 것. 바로 이 설렘과 떨림이다. '응당' 자리에 있어야 할 이 감정들이 흔적을 감춰버리니, 두 남녀가 손을 잡든 키스를 하든 뭐를 하든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야기가 아무리 허약하고, 전개에 개연성이 없어도 남녀 배우의 케미로 단점을 뚫어내는 게 또 멜로다. 애석하게도 도경수-원진아 커플 조합은 별다른 스파크를 불러일으지키 못한다. 

원작보다 나은 미덕이라면 신파를 걷어낸 후반부 각색이다. 여주인공이 천식 환자라는 설정을 과감하게 제거함으로써 신파의 늪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미리 피했다. 원작에서 다소 과묵했던 남자 캐릭터는 무해한 밀크남으로 변모했는데 여기엔 도경수가 부여한 감성의 힘이 크다. 도경수는 이번 영화에서 상대 배우와의 케미는 보여주지 못하지만, 심지 있는 남성성과 부드러운 소년성을 모두 끄집어 보이며 다양한 결을 지닌 배우임을 알린다. 문득, 할리우드 재즈영화 '위플래쉬(2015)'가 한국 버전으로 탄생한다면 천재 소년 앤드류 역으로 제격이겠단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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