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석유의 전쟁터… 내전·부패 얼룩진 아프리카 최대 도시[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2025. 1. 3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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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42) 나이지리아 라고스
15세기 노예무역 중심지
1861년엔 英이 도시 점령
종족·종교갈등 부추겨
아체베 “백인이 들어왔네…
우리는 산산이 부서졌네”
1956년 阿최대 유전 발견
수출항으로 번영 누렸지만
부패·착취… 위험도시 전락
1999년 민주화 이후엔
영화산업 부상, 도약 꿈꿔
나이지리아 라고스 마코코 지역 운하의 수상 가옥과 주민들. 게티이미지뱅크

“외국 열강과 초국적 기업은 독재정권과 상대하기 좋아한다. 감독이 느슨해 국부는 빨려 나가고, 대지는 광산 개발로 퇴화하고, 석유에서 나오는 가스 불이 생태계와 환경을 파괴한다. 예부터 물고기를 잡던 웅덩이는 오염되고, 새들은 죽어서 땅바닥에 떨어진다.”

‘오브 아프리카’에서 월레 소잉카는 나이지리아에서 진행되는 환경 재난을 전 세계에 호소했다. 소잉카는 1986년 아프리카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다. 오랫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 온 권위주의 정권은 외세와 결탁해서 국토를 무분별하게 파헤쳤다. 그 결과, 나이지리아의 풍요로운 대지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못할 곳이 됐다. 고향에서 쫓겨난 자들이 몰려든 곳은 나이지리아의 옛 수도 라고스였다. 1950년대 약 33만 명에 불과했던 라고스 인구는 2023년 말 약 2100만 명까지 팽창했다.

라고스는 라고스섬을 중심으로 그 근처에 있는 이코이섬, 빅토리아섬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로, 다리로 이어진 육지 지역까지 포함된다. 1991년 인구 분산을 위해 수도가 내륙의 아부자로 옮겨질 때까지 나이지리아 정치경제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높은 인구증가율과 성장률을 고려할 때, 라고스는 21세기 중반쯤엔 세계 최대 도시가 되리라 전망된다.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2023년 말 인구는 약 2억2380만 명, 세계에서 6번째다. 남쪽엔 석유, 천연가스 등 자원이 넘쳐나는 나이저 삼각주가 있고, 내륙엔 열대우림이, 북쪽엔 사하라 사막의 영향을 받은 사바나 고원이 있다. ‘문명의 충돌’에서 새뮤얼 헌팅턴은 인구, 자원, 위치 등 모든 면을 고려할 때, 나이지리아가 아프리카 핵심국으로 성장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종족 및 종교 갈등이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처럼, 1960년 영국에서 독립할 때 나이지리아도 서구 제국주의의 이익에 따라 강제로 국경선이 생겨났다. 그 탓에 하우사-풀라니족(29%), 요루바족(21%), 이보족(18%) 등 약 250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종족 국가가 됐고, 종교도 북부의 이슬람교(40%), 남부의 기독교(35%)로 크게 나뉘었다. 영국은 식민 통치 내내 종족 분열을 자극하고, 종교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나이지리아인을 분할 통치했다. 그 탓에 독립 이후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는 등 뿌리 깊은 반목이 이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탈식민주의 문학의 기수인 치누아 아체베는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 제국주의가 나이지리아의 영혼을 어떻게 좀먹었는지를 밝혔다. “백인은 종교를 가지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들어왔네. 우리는 그의 바보짓을 즐기면서 여기에 머물도록 했네. 이제 그가 우리 형제들을 손에 넣었고, 우리 부족은 더 이상 하나로 뭉쳐 행동하지 않네. 그가 우리를 함께 묶어 두었던 것들에 칼을 꽂으니, 우리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네.”

라고스에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건 15세기 후반이다. 서양과의 무역이 활발해지자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일부가 대륙에서 건너와 마을을 건설한 후, 후추를 심어 농장을 일구었다. 1472년 포르투갈이 처음 방문한 후, 라고스는 빠르게 서아프리카 무역의 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포르투갈은 이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베냉왕국의 오바(군왕)와 협약을 맺고 노예무역을 전개했다. 이후 라고스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을 브라질로 실어 나르는 대서양 삼각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됐다. 1530년에서 1850년, 나이지리아와 이웃 베냉에서 브라질로 끌려간 노예 숫자는 약 400만 명에 달했다. 이슬람학자 무함마드 이븐 마사니는 “이 땅의 많은 자유 이슬람인이 유럽 기독교도에게 팔려 갔다”라고 기록했다. 1861년 영국이 도시를 점령해 식민지로 만들 때까지 노예무역은 지속됐다.

라고스의 중심부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상점가. 게티이미지뱅크

이후, 라고스는 영국 함대의 기항지로, 식민지 중심지가 됐다. 부와 기회를 좇아서 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 전역에서 이주자가 몰려들었다. 브라질 등에 끌려간 노예 출신 후예들도 돌아와 이 도시에 자리 잡았다. 이른바 ‘브라질 거리’는 그 영향으로, 독특한 포르투갈 양식의 건축물로 가득하다. 20세기 초, 라고스는 내륙으로 진격한 영국군 정책에 따라 1906년 나이지리아 남부의, 1914년엔 나이지리아 전체의 수도가 됐다. 제국주의 침략은 나이지리아 정체성 형성의 한 계기가 됐다.

‘천의 정령이 사는 숲’(1938)에서 대니얼 O 파군와는 요루바족 설화를 정리해서 소설로 발표했다. 요루바어로 쓰인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아카라오군은 모든 왕의 영토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비밀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현자의 집에 이른 그가 “병의 집에서 죽음의 집으로 옮겨가고, 고통에서 멸시로 나아가는” 삶의 고통을 호소하자 여신은 답한다. “이 세상에서 네가 받을 몫이 고생이란 걸 알아. 하지만 죽기 전에 이 세상을 이롭게 하고, 처음 왔을 때보다 더 나은 세상을 남기려고 노력해. 그러면 나이 들어서 인생이 너를 존중할 거야.” 식민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행복을 갈망하는 나이지리아인들의 염원이 잘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서아프리카 현대문학의 개척자 아모스 투투올라의 ‘야자열매 술꾼’(1952)에 큰 영향을 줬다. ‘야자열매 술꾼’은 한 술꾼의 저승 여행을 다룬 작품이다. 절친과 술 마시던 기억을 잊지 못한 주인공은 저승으로 떠난다. 고난 끝에 죽은 친구와 만나서 한바탕 술자리를 펼친 그는 달걀을 선물로 받아 돌아와 굶주린 마을 이웃을 구한다. 죽음을 초월한 우애, 야자 술이 상징하는 전통문화, 착취로 인한 기아 등을 해결하는 영웅의 면모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서아프리카식 잡종 영어로 쓰인 독특한 문체, 빈번히 등장하는 요루바족 관용표현 등으로 아프리카 문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투투올라 이후, 침략자의 언어인 영어로도 아프리카 고유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할 수 있다는 발상이 생겼다. 수많은 종족과 언어로 이루어진 현실에서 영어는 나이지리아 정체성을 표현하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이기도 했다. 물론, 고유 언어를 버리는 것이 정체성 포기로 이어질 위험에 대한 비판도 치열했다. 그러나 소잉카, 아체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치고지에 오비오마 등 나이지리아 주요 작가들은 모두 영어로 작품을 쓰면서, 백인들 문학에 나타나는 식민주의적 아프리카 이미지(의식의 백인화)에 저항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1956년 니제르강 삼각주에서 아프리카 최대 유전이 발견된 것은 라고스에 축복이면서 저주가 됐다. 석유는 나이지리아 수출액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라고스는 그 수출항으로 번영을 거듭했다. 그러나 1960년 독립 이후, 군사 독재정권의 무능과 실책, 부정부패와 착취로 인해서 검은 황금은 오히려 민중들 삶을 옥죄는 사슬이 됐다. 사람들은 대지에서 쫓겨나고, 땅은 검게 물들었으며, 식수는 오염됐다. 1995년 사회운동가 켄 사로위와가 다국적 석유회사의 환경 파괴에 저항하다 살해당하기도 했다.

독재 권력은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사익을 위해서 제멋대로 사용했다. ‘아프리카의 운명’에서 마틴 메러디스는 일상적 횡령과 국고 약탈의 참혹한 실상을 전했다. “학교와 병원은 퇴락하고, 고등교육은 무너졌으며, 도로에는 수많은 구멍이 팼다.” 심지어 산유국인데, 국내 석유 공급량이 부족하기도 했다. 부패 탓에 라고스는 최악의 위험 도시가 됐다. 부족한 인프라는 매일 6000명 이상 증가하는 인구를 도시 변두리 슬럼, 마약과 범죄의 소굴로 내몰았다. ‘조정당한 인생들’(1995)에서 피델리스 발로군은 “부자가 되어 가는 극소수가 내버린 쓰레기 더미는 점점 늘어나는 극빈층의 식탁이 됐다”라고 말했다. 경제의 최대 적은 독재였다.

그러나 1999년 민주화 이후, 라고스는 기회의 땅으로 떠올랐다. 은행업과 금융업이 발달하고 상업과 제조업, 스타트업이 몰리면서 아프리카의 미래가 됐다. 연간 900편 이상 생산되는 영화는 이 도시를 ‘날리우드’로 만들었다. 종사자 수만 100만, 가난한 천재들이 창조력을 바탕삼아 넷플릭스 등 전 세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영화를 공급한다. ‘디 자이트’에 따르면, “라고스는 아프리카의 맨해튼, 할리우드, 실리콘 밸리가 합쳐진 도시다.” 과제는 남아 있다. 빈부 격차, 종족 갈등, 종교 갈등에 더해서 기후 위기로 인해 도시가 가라앉는 중이다. 번영과 도약의 디딤판에서 오늘도 아프리카 최대 도시 라고스는 꿈틀대는 중이다.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영국의 분리 통치

영국의 나이지리아 분리 통치는 악명 높다. 영국은 나이지리아 북부 이슬람 지역과 남부 기독교 지역을 다른 방식으로 지배했다. 북부는 하우사족의 대리 통치를 용인하면서 봉건적 지배 구조를 남겼고, 남부 기독교 요루바족과 이보족 지역은 직접 통치하면서 유럽화를 강요했다. 1922년 설립된 나이지리아 의회에는 남부 출신만을 의원으로 선출하면서 종족 갈등을 부추기기도 했다. 영국이 아니라 서로를 미워하고 경쟁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식민 정책은 오늘날까지 나이지리아 내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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