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자살, 가까운 곳서 예방할 수 있다…동네 병원서 정신과 연계 우울증 조기 발견으로 자살 위험 ↓…'정신과 인식 개선' 큰 숙제
[편집자주] 아흔 살 할머니 이금자(가명) 씨는 올해 초 다리와 허리를 다쳐 석 달 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그때 만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울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금자 씨는 "우울? 그런 거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기자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뉴스1은 지난 두 달간 농촌에 거주하는 자살 위험군 18명과 자살 유족 7명, 주민 및 복지센터 관계자 20여 명 등 50명가량을 만나 자살 실태를 심층 취재했다. 전국 정신건강 병의원 1190곳 분포를 직접 분석한 결과 의사의 조력을 받기 쉽지 않은 농촌의 현실도 확인했다. 생명존중 탐사 기획 '외딴 죽음'을 통해 금자 씨처럼 적막감에 둘러싸인 '농촌 사람들'의 자살 예방 방안을 모색해 봤다.
지난 24일 전남 구례군에서 만난 김정숙 씨(70·가명·여)가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뉴스1 홍유진 기자
"가만있는데도 가슴이 막 뛰었어. 잠도 못 자고 테레비도 못 봤어. 연속극만 봐도 눈물이 줄줄 나 쌓으니까."
(전남·서울=뉴스1) 홍유진 김민수 남해인 기자 = 김정숙 씨(가명·70·여)는 2020년 남편과 사별한 뒤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다. 남편은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딸의 결혼을 앞두고 먼저 떠난 남편이 야속했지만 사무치게 그립기도 했다.
극심한 우울증은 자살 충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각종 통계를 봐도 자살률 1위는 대부분 우울증 등 정신건강 문제이다. 속이 타들어 가다 곪아 터진 정숙 씨는 어떻게 하여 무너진 일상을 회복했을까. 설 연휴 바로 전날인 지난 24일 정숙 씨가 운영하는 전라남도 구례군의 한 식당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낯설고 숨기고 싶던 병…"선생님, 아무래도 저 우울증인가 봐요"
정숙 씨는 우울증 증상 2년째 되던 날 의원을 찾았다.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는 아니었다. 혈압약을 처방받고자 간 동네 가정의학과 의원이었다. 구례군 주민들에게 정신 질환은 낯설고 숨기고 싶은 질병이었다. 더구나 행정구역 분류상 농촌으로 규정되는 구례군에는 정신과 의원이 들어선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지난 2023년 3월만 해도 정신과 진료를 받으려면 구례역에서 30~40㎞ 떨어져 차로 30분 이상 거리인 순천이나 남원으로 가야 했다.
정숙 씨는 동네 가정의학과 의원에서 "아무래도 우울증이 온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의사는 임시방편으로 안정제는 처방해 줄 수 있지만 보건소(정신건강복지센터)에 꼭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정숙 씨는 우울증에 맞서기로 결심했다. 구례군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연계돼 심리검사·상담을 받았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상담을 거쳐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손님들과도 말 섞기 싫어 '어서 오세요'라는 인사 외엔 입을 꾹 닫고 살던 정숙 씨였다. 3년가량 지난 지금, 그간 줄어든 약 가짓수만큼이나 정숙 씨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그는 "요즘은 아주 겁나게 좋아졌다"고 말했다. '겁나게'라는 표현을 쓰면서 정숙 씨는 환하게 웃었다. 올봄에는 단약이 목표다.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얼마 전 버섯 하우스에서 소일거리도 시작했다. 인터뷰 말미에 정숙 씨는 다시 한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찌개 '겁나게' 잘해. 다음번에 구례 오면 우리 집 한번 들러요. 찌개 요리를 해줄 테니"
정신과 가는 길 험난한 농촌…대상자 조기 발견이 중요
정숙 씨가 보건소에서 이용한 복지 프로그램의 정확한 이름은 '동네의원 마음이음 사업'(이하 동네의원 사업)이다. 이 사업은 동네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환자들 가운데 우울·불안·중독 등으로 고민하고 있는 대상자를 발견해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연계하는 서비스다.
정신과 병원으로 향하는 주민들의 발걸음이 유독 무거운 농촌에서 '동네의원 사업'이 효과적인 자살 예방 대책이 될 수 있다. 농촌은 부족한 의료 시설과 폐쇄적인 분위기가 맞물려 정신 건강 개념이 아직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고기사: "강남에 정신과의원 넘치는데"…자살률 1위 농촌엔 '0곳'[외딴 죽음]④>
농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년층은 '마음의 적신호'를 스스로 알아채기 어렵다. 우울증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내색하지 않거나 우울증에 걸렸는지 모르는 노인이 다수라는 의미다. 이런 경우 불면과 소화불량 등 신체화 증상으로 동네 병원을 먼저 찾을 수 있다. 이때 동네의원에서 조기에 마음의 병을 발굴한다면 정숙 씨 사례처럼 적절한 개입이 이뤄질 수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네의원 사업'의 실효성을 기대할 수 있는 셈이다.
다만 예산 문제는 해결해야 할 과제다. 동네의원 관련 한 해 예산이 '0원'인 곳도 부지기수다. 사업 규칙상 환자 1명을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인계할 때마다 병의원에 3만 원 수당을 지급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배정된 예산이 없다면 순전히 담당 의사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3분 진료'가 일상이 된 의료 현실에서 사실상 한계가 뚜렷한 셈이다.
충남 지역의 한 정신건강복지센터 관계자는 "올해부터는 관련 예산이 0원으로 삭감됐다"며 "사업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사실상 제대로 운영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라고 전했다.
인식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예산 '0원'인 시군구도
무엇보다 정신건강을 바라보는 농촌 주민들의 인식과 이해 부족이 가장 큰 숙제다. 정숙 씨와 달리 정신과 문턱 앞에서 주저하는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동네의원 사업'을 통해 심리검사·상담까지는 하더라도 이후에 정신과 진료를 언급하면 상당수 주민이 거부감부터 나타낸다는 것이다.
구례군의 경우 정신과 전문의 치료까지 연계되는 비율은 절반 정도에 그친다. 구례군 정신건강복지센터 관계자는 "동네의원을 통해 연계된 대상자 가운데 절반 가까이는 결국 정신과 치료를 거부하신다"며 "약물 치료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거나 의지로 해결하겠다는 분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충남 논산의 한 농촌마을 쉼터 방 안에 걸린 달력. 12월에도 달력 페이지는 11월에 머물고 있다. 2024.12.2 ⓒ 뉴스1 홍유진 기자
2017년 동네의원 사업을 최초로 도입한 광주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는 지난해 한 해 동안 95명을 동네의원에서 연계 받았다. 이 중 약 48명(55%)만 지속적으로 정신과 치료에 참여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이번 사업의 모범 사례가 된 곳으로 전국에서 자살 예방 관련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는 지역 중 하나다. 5·18 민주화운동의 상흔으로 정신 건강 복지가 발달한 영향도 있다. 그런 곳조차 대상자를 정신과 치료까지 연계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광주에서 8년째 동네의원 사업에 참여 중인 강주오 행복을 주는 가정의학과 원장은 '환자들의 인식 부족'을 가장 어려운 점으로 꼽았다. 열악한 의료 여건과 환자들에게 책임감을 느껴 사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환자들의 부족한 인식으로 발생한 현실의 벽에 자주 가로막힌다며 한숨을 쉬었다.
강 원장은 "신체화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 중에도 정신건강 문제로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며 "대부분은 정신 건강을 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 할 분들이 도리어 마음의 병을 키우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장이 '생명지킴이'로 변신…농촌 특성 반영한 대책 필요
농촌은 물론 비수도권 지역 주민들의 정신 건강 인식 개선이 최우선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강 원장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정신건강 교육이나 캠페인이 활발하게 진행해야 한다"며 "일반 시민들이 정신건강 복지 서비스를 쉽게 누릴 수 있도록 개별 사업 홍보나 접근성을 강화하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자살 고위험군 대상자를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도 해결책으로 제시됐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대상자를 직접 찾아가는 서비스를 통해 꾸준히 설득하는 방식도 효과적"이라며 "오랜 기간 신뢰 관계를 구축한 사람 설득했을 때 치료 연계율이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마을 실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이·통장 또는 종교기관장 등을 활용해 '지역 활동가'로 양성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지역 관계망(네트워크)가 좁은 농촌 특성상 자살 고위험군이나 정신질환자를 지근거리에서 발굴하고, 치료까지 연계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백 교수는 "강원도에서 교육을 거친 이·통장들을 '생명 지킴이'로 투입해 자살예방 활동에 참여하도록 했더니 실제로 도움이 됐던 사례가 있다"며 "정신과 접근성이 떨어지는 농촌의 경우 마을 내 리더십을 활용한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