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하면 실종된 '개천의 용' 되살릴 수 있을까 [視리즈]

한정연 기자 2025. 1. 2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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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커버스토리 視리즈
계층사다리 실종사태❸ 이동성
대기업 국내서 일자리 창출 적고
영업이익 협력업체보다 훨씬 많아
국내 임금근로자 소득 증가 제한
재벌 집중도, 증시 디스카운트 요소
상법 개정으로 자산 축적 정상화

우리는 계층사다리 실종사태 2편에서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으로 사회이동성이 경직된 한국 사회를 조명했다. 대표적 불평등 국가인 미국조차 임금 소득의 양극화를 개선했는데도, 우리나라의 소득 격차는 매년 최대폭으로 벌어지는 상황도 알아봤다. 3편에서는 계층사다리가 실종된 경로와 회복시킬 방법을 살펴봤다. 그 중심엔 상법 개정이 있다.

재계의 반대로 상법 개정이 미뤄지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우리나라에서 계층사다리는 어떻게 실종됐을까. 이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과거 성장지상주의 정부가 소수의 수출 대기업에 법과 세금 혜택을 몰아줬던 부작용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수출 대기업들은 두가지 측면에서 국내 임금근로자의 임금 소득 증가를 제한하고 있다.

첫째, 대기업이 직접 고용하는 인원이 적어서 이들의 임금 상승 효과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 300인 이상 기업 월평균 실질임금이 2020~2023년 증가하긴 헸지만, 일자리 자체가 너무 적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으론 전체의 13.9%, 통계청 기준으론 32.0%에 불과하다. 미국과 일본의 대기업 일자리 비율은 각각 57.6%, 40.9%에 이른다.

둘째,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이 몇배씩 상승하는 사이 납품업체 영업이익률은 오히려 하락하고, 이는 중소·중견기업 임금을 제한하는 원인이 됐다. 대기업 임금을 100으로 봤을 때 중소기업 임금의 비율은 2000년 65.0%였는데, 갈수록 줄면서 2023년에는 53.6%로 떨어졌다.

원인은 가혹한 납품단가 조정에 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2020년 보고서에서 재벌 소속 A사 영업이익률이 2017년 2년 만에 두배 상승하는 동안 전속 협력업체들 영업이익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 사실을 지적하며 "대기업이 영업이익 증가분을 하도급 업체와 나누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재벌들은 개인의 자산 축적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재벌 대기업들은 자회사 신설과 물적분할을 남발해 총수의 자산 투입 없이 자본을 축적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발생시켰다. 그 결과, 개인들은 미국 등 선진국처럼 자산 축적을 국내 증시에서 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미국 증시나 국내 부동산 투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재벌의 경제 집중도는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서구권에서는 재벌을 고유명사인 'Chaebol(재벌)'로 표기한다. 코스피에서 4대 재벌 가문이 보유한 기업집단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7월 2일 기준 대략 70%였다. 재벌 총수 4명은 시총의 극히 일부분만 보유했지만, 코스피 시총 70%에 해당하는 기업들 운명은 소액주주들과 상관없이 총수 4명이 결정한다는 뜻이다.

미국과 비교해도 우리 경제의 재벌 집중도는 이례적인 수준이다. 미국 정부가 시장 경쟁을 해친다는 이유로 반독점소송으로 해체하려 한 아마존의 2023년 매출은 5747억 달러로, 미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가량이다.

1차 반독점 소송에서 미 정부에 패소한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매출은 2023년 3073억 달러였는데, 미 GDP 대비 매출의 비중은 1%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반면, 우리나라 4대 재벌의 매출은 2023년 기준 한국 GDP의 40.8%, 30대 재벌 매출은 GDP 대비 79.6%를 차지했다(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일본 증시를 모방한 밸류업이라는 정책을 내놓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원인 분석도 해법도 핵심을 비껴갔다. 일본 증시의 부활은 지배구조 개편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재벌財閥(자이버츠) 체제를 겪었고, 지금은 총수 자리에 은행·상사와 같은 기업을 앉혀놓은 계열系列(게이레츠)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증시가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갑자기 인기를 끈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은 임금 상승을 동력으로 디플레이션 상태에서 벗어났다. 둘째, 재벌 체제에 이어 등장한 계열 체제의 지배구조 개편에 나섰기 때문이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올해 3월부터 PBR(주가순자산비율)이 1보다 낮은 상장사를 1년간 집중 모니터링하고, 1년 동안 이를 해소하지 못하면 주식 거래를 일정기간 중지한 후 상장폐지하겠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금융청은 2017년 스튜어드십코드를 개정하면서 "기관투자자와 지분 소유자는 피투자 기업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적시했다. 사업 수익성 변화 없이 ROE를 끌어올리려면 사내에 현금을 과잉 보유하지 않거나, 계열내 기업간 상호출자를 줄이거나, 자사주 매입을 늘리거나, 실적이 저조한 자회사를 정리해야 한다. 영국 자산운용사 맨그룹은 "일본의 새로운 지배구조 규정을 보면 각주에 ROE 등 여러 장치가 들어가 있어 이번에는 정말 다를 것"이라고 평가했다.

증시가 살아나면 자산 축적을 통해 계층사다리를 좀 더 편하게 올라갈 수 있다. 미국 증시 대형주로 구성된 S&P500 지수는 2024년 1월 8일부터 1년간 24.05% 상승했고, 2020년 1월 10일부터 5년간은 80.96% 상승했다. 미국인들은 자국 증시 활황에 맞춰 투자를 늘렸다.

미국 가구와 비영리단체가 주식을 보유한 비율은 2010년 26.3%에서 2020년 30.5%로 2024년엔 무려 41.6%로 커지면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2021년에 근접하고 있다. 미국인 개인 중에서 2024년 1분기에 주식을 소유한 비율은 62.0%로 20년 만에 최고치였다. 저소득층 개인도 25%가량이 주식을 보유했다. 지난해 1분기에만 미 증시의 전체 자산 가치는 전 분기보다 3조8000억 달러 증가했다.

우리나라 증시가 살아나서 자산 축적에 도움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기업들의 지배구조 체제를 개선해 경제 집중도를 완화해야 한다. 4개 기업집단이 코스피의 70%를 지배하는 한 미국 증시와 같은 상승장을 기대할 순 없어서다. 중복상장과 같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소도 근절해야 한다.

결국 상법 개정이 필요하다. 재벌 총수와 같은 지배주주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거다. 세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상법 제382조의 3을 개정해 이사의 '주주충실의무'를 신설해야 한다.

현행법은 등기이사가 법령과 전관의 규정에 따라서 회사를 위해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이사에게 지배주주의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라'고 지시하는 것과 같다. 이사들이 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지시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 상법상으로도 가능하려면,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명시해야 한다.

일본 증시는 지배구조 개편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도쿄증권거래소 모습. [사진 | 뉴시스]

둘째, 지배주주의 신인의무다. 지배주주가 소액주주에게 가져야 할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와 충실의무를 지키는 게 신인의무다. 미국 델라웨어 회사법에 명시돼 있는 개념이다. 지배주주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하는 부당한 사익을 추구하면 책임을 지라는 얘기다.

이 조항만 있다면, 중복상장을 직접 규제할 필요도 없다. 지배주주가 자신의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침해한 행위로 처벌할 수 있어서다.

셋째, 업무집행지시자의 처벌 규정이다. 상법 401조의 2는 회사의 대표이사에게도 업무지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업무집행지시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총수와 같은 업무집행지시자가 계열 회사의 대표이사에게 불법적 업무지시를 해도 지금은 회사나 다른 이사와 연대해서 그 책임을 지도록 돼있다.

지시한 사람이 지시받은 사람보다 약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업무집행지시자를 지배주주나 총수로 확실히 규정하고, 별도의 처벌 규정을 상법에 명시하면 불법적이거나 소액주주에게 불리한 지배주주의 지시를 미리 막을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한 조항이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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