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새가슴’ 즈베레프는 메이저 트로피 없는 최고의 선수로 남을 것인가?

“바로 옆에 서 있는데도 만질 수 없다는 건 X 같다.“
알렉산더 즈베레프(28·독일)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습니다. 26일 끝난 시즌 첫 메이저 테니스대회 호주오픈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였습니다. 즈베레프 옆에는 대회 우승 트로피와 함께 자신에 뼈아픈 완패를 안긴 세계 랭킹 1위 야닉 시너(24·이탈리아)가 당당히 서 있었습니다.
세계 랭킹 2위 즈베레프는 이번 대회까지 메이저 무대 결승에 3차례 올라 모두 패했습니다. 앞서 2020년 US오픈과 지난해 프랑스오픈에서도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ATP 투어에서 통산 23회 우승, 2021년으로 한 해 연기돼 치러진 2020 도쿄올림픽 금메달 등 화려한 성적에 비해 메이저 대회에선 맥을 못 췄습니다. 3차례 4회전 진출이 최고 성적인 윔블던에서도 준우승을 추가한다면 ‘2위 슬램’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이 붙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첫 메이저 결승전에서 모두 패한 선수로는 안드레 애거시, 고란 이바니세비치, 앤디 머레이, 도미니크 팀, 캐스퍼 루드에 어 6번째입니다.
즈베레프는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노박 조코비치의 뒤를 이을 에이스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러시아에서 테니스 선수로 활약한 부모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198cm의 월등한 신체조건을 앞세워 세계 테니스를 평정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집요한 베이스라인 플레이는 네트 넘어 적을 제 풀에 지치게 할 때가 많았습니다.

<사진> 호주오픈 2연패에 성공한 24세의 신예 시너와 메이저 대회 결승에서 3전 전패를 기록한 즈베레프, AO 페이스북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태어난 시너와 카를로스 알카라스(22·스페인)에게 오히려 밀리는 양상입니다. 시너는 호주오픈 2연패와 지난해 US 오픈에서 정상에 오르며 하드코트 제왕이라는 칭호까지 붙었습니다. 메이저 대회 결승에 3차례 올라 모두 이기며 승률 100%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카라스도 프랑스오픈과 윔블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시너는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이후 50경기에서 47승을 올리는 눈부신 승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승세는 1973년 랭킹이 공식 도입된 후 비외른 보리와 지미 코너스가 세운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판세를 보면 즈베레프는 마치 위로부터 치이고, 아래에서도 치여 번번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샌드위치 세대’가 된 것 같습니다.
테니스 전문가들은 즈베레프의 ‘새가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메이저 타이틀이 걸린 큰 대회에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견뎌내지 못한 탓에 실책을 쏟아내 자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대회 결승에서도 고비에서 미스샷을 연발하지만 시너는 결정적인 순간에 서브 에이스로 경기 흐름을 가져갔습니다. 시너는 ”준결승과 결승에서는 몸에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되고 그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즈베레프는 조코비치와의 준결승에서도 19개의 포핸드 실책을 범했습니다.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하기 전까지 조코비치는 포핸드 에러를 9개만 했죠. 조코비치가 기권하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호주 언론은 ‘즈베레프의 포핸드는 관리되지 않는 정원의 호스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라고 보도했습니다. 마치 뱀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물을 흩뿌리는 것처럼 보였다는 의미죠. 즈베레프는 결승에서도 서브에이스 12개를 앞세워 경기 주도권을 잡으려 했지만, 시너(27개)보다 18개가 많은 45개의 실책을 범하며 자멸했습니다.
즈베레프는 세계 랭킹 2위였던 2022년 발목 부상으로 한동안 코트를 떠났는데 상승세가 꺾인 아쉬운 대목입니다.

<사진> 호주오픈 결승이 끝난 뒤 위로와 축하를 나누는 신네르와 즈베레프. AO 페이스북.
호주오픈 시상식 도중 관중석에서는 ”호주는 올가와 브렌다를 믿는다”라는 한 여성의 야유가 두 차례 터져 나와 정적을 깨뜨리기도 했습니다. 올가와 브렌다는 과거 즈베레프가 가정 폭력을 가했다는 의혹을 받은 상대 여성입니다. 이 바람에 즈베레프는 준우승 소감을 제때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두 사건 모두 입증되지는 않았습니다. 브렌다와는 법정 밖에서 합의했고, 올가에 대한 장기 조사를 증거 불충분으로 중단됐습니다. 즈베레프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오점일 겁니다. 물론 경기력에도 영향을 주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시너는 스테로이드 양성 반응에 대한 심리를 받고 있어 ‘약물 리스크’가 탄탄대로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자신이 결백을 주장하면서 코트에서만큼 모든 걸 잊고 플레이에만 집중한다고 합니다. 호주오픈에서는 라이벌 알카라스와 조코비치가 8강 대결을 펼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체력을 아낄 수 있게 된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즈베레프는 통산 상금이 5천만 달러를 돌파해 이 부문 5위에 올랐습니다. 그의 앞에는 조코비치, 페더러, 나달, 앤디 머레이(영국)가 있을 뿐입니다.
시너는 즈베레프를 향해 ”당신은 단연 세계 최고의 선수다. 그가 침체해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그보다 더 많은 트로피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로가 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까요.
즈베레프는 메이저 대회에서 톱5 플레이어를 상대로 한 14경기에서 13패를 당했습니다. 페더러는 즈베레프가 그랜드슬램에서 아직 우승하지 못한 이유를 언급하며 ”중요한 순간에 매우 수동적으로 플레이한다. 뭔가 더 찾아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라고 조언했습니다. 즈베레프 역시 ”나도 잘 아는 바다“라고 말했습니다.
테니스는 대표적인 멘탈 스포츠입니다. 승리를 위해선 늘 자신에게 긍정적으로 말하고, 상대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자신감을 갖고, 자신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마인드가 없다면 어떤 무기를 갖고 있든 이길 수 없습니다.
이제 즈베레프는 ‘메이저 타이틀이 없는 최강’이라는 표현이 꼬리표처럼 붙게 됐습니다. 그 오명을 지워버릴 수 있게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즈베레프 자신일 겁니다.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글= 김종석 기자(tennis@tenn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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