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아버지 김건후의 모진 운명 더는 반복되지 않길”
[짬] 김건후 자료·논문집 펴낸 김재원·이숭희 부부
“제일 큰 거는 나라 잃은 거죠. 나라가 일제 치하에 들어가니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게 출발이었죠.”(이숭희)
“격변의 시대에 태어나셨고 또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정신이 굉장히 투철하셨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하는 애국 정신도 굉장히 강했다는 생각도 들고요.”(김재원)
김재원 전 인천가톨릭대 교수와 이숭희 국방대 명예교수 부부가 아버지 그리고 장인인 김건후(1904~?)의 파란만장한 생애의 배경을 두고 한 말이다.
둘은 2022년 김건후 자료집 ‘잊혀진 이름, 잊혀진 역사-김건후, 칭치엔허, 허버트 김, 게르베르트 김’(푸른사상)을 함께 엮었고 최근엔 김건후 논문집 ‘경계인 김건후’(경인문화사)도 냈다. 논문집은 딸은 엮은이로, 사위는 김건후의 해방 후 활동을 짚는 논문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자료집에는 김건후가 1937년부터 4년 반, 옛 소련의 감옥과 수용소에 갇혀 강제노동을 한 기억을 정리한 친필 수기와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 등 한국내 정치 활동에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한 레너드 버치 미군정 중위가 김건후에 대해 쓴 글 등이 담겼다.
지난 17일 오전 서울 당산역 근처 카페에서 부부를 만났다.
“허버트 김(김건후)은 세개의 세계(제1, 2, 3세계)에 대해 심오하고 또한 어렵게 얻은 지식으로 무장한 철학자였다.” 버치 중위 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말처럼 1904년 평양 남쪽 강서에서 태어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납북된 뒤 소식이 끊긴 김건후의 삶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종주국인 미국과 소련, 반식민지 중국의 땅 곳곳과 연결되어 있다.
10대 초반 감리교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부친 김홍서(1886~1959)를 따라 중국에 망명한 김건후는 중국 국적을 취득해 1923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광산학의 미래 실용성에 주목”한 그는 콜로라도 광산대학을 나와 1930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광산학 석사학위를 땄다. 같은 해 유대계 미국인 폴린 리브만과 결혼하고 바로 옛 소련으로 취업이주를 결행했다. 대공황으로 미국에서 일자리를 찾기 힘든 데다, 소련이 광물의 보고란 점과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우호적 태도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폴린은 황인종인 ‘중국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미국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김건후는 소련행 7년 만인 1937년 카자흐스탄에서 일본을 위한 간첩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됐다. 물론 증거도 없는 조작이었다. 당시 그는 카자흐스탄 졸림베트 광산에서 기술부소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구금 1년 만에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25년으로 감형돼 북극권 탄광 지대 등 동토의 땅 곳곳을 옮겨 다니며 고통스럽게 수형 생활을 했다. 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 김건후는 풀려나 중국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한 부친의 지인인 주소련 중국대사의 구명 노력이 컸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해방 전까지 중국 서북부 간쑤성에서 중국 정부를 위해 광산 기술자로 일하다 1946년 귀국했다.
미·소·중 세 나라의 광산 개발을 경험한 그는 미군정 광산국장과 영월 상동의 세계 최대 규모 텅스텐 광산(대한중석 전신) 기술부장을 지내며 해방 조국에서 전문성을 발휘했지만 역사의 무게는 그를 다시 짓눌렀다. 1948년 미국에서 11년 만에 만난 아내 폴린은 극심한 소련 트라우마로 미국을 떠나길 거부해 결국 이혼했다. 직장에서도 윤보선 당시 상공부 장관 등 이승만 추종 세력들이 오랜 소련 생활 등을 꼬투리 삼아 그를 사상적으로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몰아 결국 한직으로 밀려 났다. 그리고 얼마 뒤 전쟁이 나고 그는 이복동생과 함께 북으로 끌려갔다.
김건후 납북 5개월 뒤 태어난 김재원 교수는 아버지를 본 기억이 없다. 이광수 작가 중매로 1949년 11월 ‘이혼남’ 김건후와 결혼한 어머니 정정식 전 이화여대 교수(피아노 전공)는 딱 8개월 신혼 생활 뒤 남편을 잃고 홀로 딸을 키웠다. “2015년 작고한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짧은 기억으로 평생 버티셨어요. 16살 연상 아버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이 컸죠. 세계 돌아가는 정세에 해박한 멋쟁이였다면서 아버지를 대단한 인물로 기억하셨어요. 어머니가 1958년부터 62년까지 중립국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하셨는데요. 당시 빈에서 열린 세계 청년공산주의 대회에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원봉사자로 등록하셨다고 해요. 북한 사람들에게 혹시 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요. 결국 무위로 그쳤지만요.”
독립운동가 부친과 함께 중국 망명 다시 미국 유학 가 ‘광산학 석사’ 따
대공황 시기 옛 소련 광산회사 취업
스탈린 숙청기에 체포돼 4년반 투옥
석방 뒤 장개석 중국 정부 위해 일해
해방 뒤엔 조국에서 광산 엔지니어로
이승만 정부서 사상적으로 의심받고
한직으로 밀린 뒤 한국 전쟁 때 납북
딸 부부 2016년부터 생애 복원 노력
미·러·카자흐 찾아 자료 발굴
그가 2016년 정년 퇴임 뒤 바로 김건후 생애 복원에 나선 것도 어머니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다며 생전에 매우 안타까워 하셨어요. 2013년쯤 어머니에게 제가 퇴임하면 아버지 정보를 꼭 찾아보겠다고 약속했죠. 그 말에 어머니가 무척 흐뭇해하셨는데 딸 퇴임 1년을 앞두고 돌아가셨죠.”
그는 고인이 된 모친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17년 남편과 함께 미국 답사에 나서 국립기록보관소의 한국전쟁 미군 노획 문서에서 ‘김건후 심문록’을, 하버드대 옌칭도서관에서 아버지의 친필 수기와 버치의 글을 찾아냈다. 이듬해는 카자흐스탄에 가 내무부에서 400쪽 분량의 부친 재판 기록도 손에 넣었다. 이어 김건후가 수형 생활을 한 러시아의 연방보안국과 국립문서보관소를 방문했지만 이들 기관의 비협조로 석방증명서 확보 외에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고 한다.
최근 나온 논문집은 구로미야 히로아키 미 인디애나주립대 사학과 명예교수,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원, 윤은자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등 연구자들이 중국 망명에서 납북까지 김건후의 활동을 시기별로 나눠 상세히 밝힌 글을 모았다. 딸이 최기영 서강대 명예교수 등의 도움을 얻어 전공자를 수소문해 논문 작성을 의뢰했단다.
구로미야 교수는 논문에서 “김건후의 소련에서의 삶은 스탈린 치하 소련 생활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언”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 김건후 수기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 대한 호감으로 이 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이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터무니없는 죄명으로 투옥되어 자원 채굴 노역이나 기차로 광활한 대륙을 오가는 이동 과정에서 극한의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김건후는 수기에서 “죄수의 노동력이 없었으면 (소련은) 보르쿠타(북극권 탄광)까지 철도를 놓을 수 없었을 것이고 보르쿠타 탄광도 개발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스탈린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들인 데는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컸을 것이라고 짚었다. 소련 비밀경찰이 김건후를 풀어주면서 “(중국) 충칭에는 수많은 한국인 파벌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신뢰할 만한 리더로 (소련은) 김약산(김원봉)을 생각하고 있다. 충칭에 가면 김약산과 함께 일해라”고 ‘지침’을 줬다는 수기 기록도 눈길을 끈다.
이숭희 교수의 논문 ‘해방 후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김건후의 적응’도 김건후 행적을 통해 해방 후 5년 한국 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김건후가 1949년 상공부 광산국에서 퇴출당하기 전, “김건후는 공산주의자”라는 소문이 퍼졌는데 그 중심엔 윤보선 상공부 장관이 있었으며, 김건후는 이후 구명 운동 과정에서 미군정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의 집을 찾아 자신의 신상에 대해 직접 해명해야 했다고 김건후 편지 자료 등을 토대로 밝혔다. 이 교수는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미국 선교사 조지 피치(1883~1979·독립장 서훈)가 1947년부터 1년 동안 자택에서 연 ‘한미토론그룹’ 모임에 김건후는 조봉암, 장기영, 변영태, 임영신, 버치 중위 등과 함께 참석했으며 이 모임 참석자 대부분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대세로 수용했지만 김건후는 단독정부 수립은 38선 고착화로 북한과의 통합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내용도 소개했다.
“허버트 김(김건후)이 겪은 역경과 불행은 조국을 잃은 한 지식인이 짊어져야 했던 모진 운명이다. 그의 삶은 한반도를 둘러싼 격동의 현대사에서 무력한 한 개인이 처참하게 희생된 현장과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중략) 과거의 불행은 과거의 사건일 뿐, 미래는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지금 우리는 알지 못한다.”
딸 김재원 교수가 3년 전 나온 자료집 에필로그에서 쓴 글이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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