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구태한 계층사다리엔 '희망'마저 없었다 [視리즈]

이지원 기자 2025. 1. 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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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커버스토리 視리즈
계층사다리 실종사태➊ 한국인 삶
심화하는 소득 · 자산 불평등
양극화 전세계 공통 문제지만
불평등 완화 성과 낸 미국
계층사다리마저 실종된 한국
한국인의 삶은 어떠한가…
부모 경제력 자녀 대물림
사다리 실종 희망 실종 의미
청년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계층사다리는 실종된지 오래다. [일러스트 | 게티이미지뱅크, 더스쿠프 포토]

# 물려받은 것도, 물려줄 것도 없는 당신께 여쭙니다. 저기 저 앞에 '계층사다리'가 있습니다. 소득이든 사회적 지위든 끌어올릴 수 있는 일종의 발판입니다. 어떠신가요? 저 사다리에 발을 얹으면, '한단계 더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물론 땀을 흘렸다는 전제를 깔고 말이죠.

# 글쎄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서민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 모릅니다. 그런 사다리를 본 적이 없으니까요. 약 올라서, 억울해서, 불편해서 늘어놓는 '감정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종 통계는 '계층사다리의 실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불평등의 국가'라고 손가락질했던 미국이 '양극화 개선'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결과입니다.

# 더스쿠프 설 특집호에선 어디론가 사라진 '계층사다리'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그 첫장을 엽니다.

무너지는 계층사다리를 회복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사진|뉴시스]

'양극화'는 전세계 대다수의 국가가 겪는 공통의 문제다. 자본주의의 속성상 쉽게 풀기 힘든 과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건 열심히 노력하면 계층이 올라가는 '사다리'가 존재하느냐다. 이른바 '계층사다리'만 튼튼하다면, "언젠가 양극화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란 꿈 정도는 꿀 수 있다. 한국은 과연 어떨까.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나돈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부모보다 못 사는 첫 세대'가 될 것이란 전망 속에서 젊은층은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기 싫다"며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고 있다. 소득과 자산 불평등의 심화로 계층 간 이동사다리가 무너진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물론 한국만 그런 건 아니다. 고성장을 이룬 대부분의 선진국은 양극화로 몸살을 앓았거나 지금도 앓는 중이다. 그럼에도 짚어볼 건 있다. '불평등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이 '불평등 수준'을 개선한 반면, 우리나라의 양극화는 되레 깊어졌기 때문이다.[※참고: 이 이야기는 '계층사다리 실종사태' 파트2에서 자세히 다뤘다.]

문제는 12·3 내란 사태 후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까지 멈췄다는 거다. 올해 초 발표할 계획이던 '양극화 종합대책'은 언제쯤 윤곽이 드러날지조차 알 수 없다. '계층사다리의 실종'은 '희망의 실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희망이 사라져가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 중기 직장인의 삶 = 30대 직장인 김민석(가명)씨는 대기업 취업을 포기하고 중소기업에 입사한 지 7년차다. 흔히 말하는 결혼적령기를 지나고 있지만 결혼 계획은 없다. 3400만원이 조금 넘는 지금의 연봉으론 서울에서 신혼집 마련은 언감생심이다.

민석씨는 "지은 지 40년 된 구축 아파트 85㎡(약 25평)의 전셋값이 3억~4억원에 달한다"면서 말을 이었다. "모아둔 돈 7000만원에 신혼부부 버팀목 전세자금대출을 받으면 어떻게든 전셋집을 마련할 수 있겠지만 그다음이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도 제대로 지원해줄 수 없다면 안 낳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면 굳이 결혼을 해야 하나 싶다."

민석씨만이 아니다. 중소기업 직장인들은 치솟은 물가, 제자리걸음하는 급여에 미래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사이 대기업(300인 이상 사업장)과의 임금 격차는 더 커지면서 상대적 박탈감마저 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이하 10월 기준) 중소기업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315만3000원으로 1년 전(342만원)보다 9만3000원(2.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지난해 연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3%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겨우 물가가 오른 만큼 급여가 늘어난 셈이다.

반면 대기업 직장인의 월평균 임금은 561만6000원에서 591만9000원으로 5.4%(30만3000원) 증가했다. 기업 규모별 임금 격차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지고 있다. 2017년 55.8%이던 대기업 대비 중소기업 임금 비율은 지난해 53.2%로 낮아졌다.

소득 격차를 보여주는 통계는 또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를 보자. 지난해 소득 상위 10%(10분위)의 경상소득은 2억1051만원으로 하위 10%(1분위·1019만원)와 2억32만원 차이가 났다. 2017년 관련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소득 격차가 2억원 이상 벌어졌다.

민석씨는 "물가가 오른 걸 생각하면 사실상 급여는 '마이너스'인데 저축이나 투자를 늘릴 수 있겠냐"면서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게 부富의 상징이 된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꼬집었다.

■ 대기업 퇴직자의 삶 = 두 자녀를 둔 40대 이철근(가명)씨는 5년 전 서울에서 다니던 대기업을 관두고 부모님이 계신 지방으로 이사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체를 물려받을 계획도 계획이었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데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는 게 불안했지만 지금은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철근씨에게 여유가 생긴 건 무엇보다 최근 몇년 새 자산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살던 아파트를 전세로 주고 내려왔는데, 집값이 10년 전 구입 당시보다 2배가량 올랐다. 퇴직금으로 받았던 4억원은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수익률도 나쁘지 않다. 철근씨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때보다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서 "늦기 전에 셋째를 낳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철근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소득 격차는 자산 격차로 이어지기 쉽다. 먹고사는 걸 고민해야 하는 저소득층과 달리 고소득층은 여윳돈으로 오를 만한 곳에 투자해서 자산을 증식할 수 있어서다.

이같은 양극화의 지표는 서울 아파트값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격은 지난 10년 새 2배 이상 올랐다. 눈여겨볼 점은 비싼 아파트일수록 더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가격 하위 20%(1분위)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격은 2014년(이하 12월 기준) 2억2995만원에서 2024년 4억9089만원으로 113.4% 오른 반면, 상위 20%(5분위)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격은 187.0%(9억4934만원→27억2539만원)나 치솟았다.

한국의 소득과 자산 격차가 고착화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부동산 가격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고소득층으로 부의 쏠림 현상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지난해 상위 10%와 하위 10%의 자산 격차가 15억원을 넘어선 건 단적인 예다. 10분위의 평균 자산은 16억2895만원으로 1분위(1억2803만원)보다 15억92만원 많았다. 2017년(9억8348만원 차이) 이래 최대 격차다.

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자산도 상위 10%가 절반 가까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0분위의 순자산 점유율은 44.4%로 전년(43.5%) 대비 0.9%포인트 상승했다. 같은 소득 하위 50%인 1분위~5분위의 순자산 점유율은 총 9.8%에 그쳤다. 1년 전과 같은 수준이다.

자산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순자산 지니계수'도 악화했다. 2017년 0.584를 기록한 순자산 지니계수는 2018년 0.588, 2019년 0.597, 2020년 0.602, 2021년 0.603, 2022년 0.606, 2023년 0.605, 2024년 0.612로 거의 매년(2023년 제외) 높아졌다. 순자산 지니계수가 1에 가까워질수록 불평등이 심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더 큰 문제는 소득과 자산 격차가 벌어질수록 계층 간 이동은 더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양극화가 경제적·사회적 성공을 위한 '기회의 평등'마저 위협하고 있다는 거다. 통계청이 지난 12월 처음으로 발표한 '소득이동통계(2017~2022년 조사)'는 계층사다리가 사라지는 한국의 민낯을 보여줬다. 소득이동통계는 기회의 평등을 측정한 지표다. '소득이동성'이 낮아질수록 기존의 소득 분위가 고착화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소득 격차를 해소하기 어려워진다.

2018년(2017년→2018년) 소득이동성은 35.8%를 기록했는데, 이는 1년 동안 소득 분위(1~5분위)가 높아지거나 낮아진 이들의 비중이 35.8%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후 4년이 흐른 2022년(2021년→2022년) 소득이동성은 34.9%로 0.9%포인트 하락했다. 더 큰 문제는 소득 분위가 상향 이동한 이들의 비중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18.1%였던 상향 이동 비중은 2022년 17.6%로 0.5%포인트 줄었다.

계층사다리를 오르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건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국 '교육→일자리→자산형성'이란 고리가 안정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 첫 단추인 교육에서부터 불평등이 발생하고 있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교육 격차에 영향을 미치고, 교육(학력) 격차가 또다시 일자리와 소득 격차로 이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는 거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8월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 대응방안' 리포트에서 "입시경쟁이 과열되면서 소득 수준별 사교육비 격차가 커지고, 사회·경제적 지위의 대물림이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자영업자의 삶 = 50대 자영업자 최민정씨의 고민은 올해 고2가 되는 딸의 앞날이다. 마음 같아선 입시 컨설팅도 받게 해주고 싶지만 1회 수십만원에 달하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엄두조차 못 내고 있다.

가뜩이나 경기가 좋지 않아 가게 매출이 쪼그라들면서 매달 내는 학원비도 빠듯한 게 현실이다. 민정씨는 "자식 뒷바라지를 마음껏 못해주는 게 늘 마음에 걸린다"면서 "사교육이 만연하다 보니 부모의 경제력이 아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구나 싶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사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2023년 국내 사교육 시장 규모는 27조1144억원으로 전년(25조9538억원) 대비 4.5% 증가했다. 사교육 참여율은 78.5%에 달했다. 학령인구(6~21세)는 1980년 이후 매년 감소하고 있지만 사교육 시장은 되레 커지고 있다는 거다.

언급했듯 사교육비 지출 규모는 소득 수준별로 차이가 컸다. 월소득 800만원 이상 가구의 자녀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67만1000원으로 월소득 300만원 미만 가구(18만3000원)보다 2.5배가량 많았다. 사교육 참여율에서도 차이가 나타났다. 월소득 800만원 이상 가구의 사교육 참여율은 87.9%에 달했지만 월소득 300만원 미만 가구는 57.2%에 그쳤다.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학력 격차로 그대로 이어졌다. 부모 소득이 상위 20%(5분위)인 가구의 자녀(이하 1999년생 기준)의 경우 4년제 이상 진학률은 69.0%, 2년제 16.0%, 고졸 15.0%로 나타났다. 반면 부모 소득이 하위 20%(1분위)인 가구 자녀의 경우 4년제 이상 40. 0%, 2년제 23.0%, 고졸 37.0%였다. 경제적 '결과의 불평등'이 '기회의 불평등'으로 이어진 셈이다.

김준모 건국대(행정학) 교수는 "경제가 성장할수록 지표로 나타나는 양극화는 심화할 수밖에 없다"면서 "중요한 건 다음 세대가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계층사다리가 잘 작동하느냐다"고 지적했다.

"지금부터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들을 설계해나가야 한다. 특히 교육 예산의 재분배를 통해 공교육의 질質을 제고하고 누구나 계층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이 정치적 격변기에 있지만, 교육, 복지, 육아 등 양극화 문제에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만큼 관련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야 한다." 암울한 지표 속에서 맞이한 2025년, 과연 우리는 양극화 문제를 우리답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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