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입속에서 펄럭인다
[정동현의 pick] 수제비
수제비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메뉴에 수제비가 올라와 있으면 보통 그 밑에 적혀 있는 만두나 칼국수를 시키는 편이었다. 옛날 할머니는 이따금 소주병으로 밀가루 반죽을 밀어 커다란 부엌칼로 잘라 면을 뽑았다. 면을 뽑고 난 자투리로는 수제비를 뜯었다. 어른들은 그 수제비를 꽤나 좋아했는데 나는 그보다 젓가락에 면이 걸리는 무게감이 더 좋았다. 수제비는 젓가락으로 먹기에도, 숟가락을 쓰기에도 애매했다. 또 그 투박한 모습이 별것 없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날 꼭 수제비를 먹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일이 생각보다 늦게 끝났다. 2호선 전철은 사람에게 밀려 숨 쉬기 어려웠다. 내려야 할 때 나는 죄책감 없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밀며 문을 빠져나왔다. 모두가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였다. 아침과 저녁, 이름도 모를 사람들을 그저 붐빈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거추장스러워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마음이 상했다. 형과 한 약속은 이미 한참 늦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뛰며 전화를 했다. “응, 앉아 있다. 천천히 와라.”
형은 이미 식당에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샛강역에서 나와 KBS 별관을 지났다. 곧 한양아파트 앞 사거리에 다다랐다. 식당은 바로 근처 주상복합 빌딩 지하에 있었다. 이름은 ‘왕왕수제비’였다. 이 자리에서 장사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훤히 불이 켜진 가게에 형 혼자 앉아 있었다. 종업원은 그 앞을 서성이며 가게를 정리하고 있었다. 가게 이름이 그러하듯 수제비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변덕스러운 여의도 직장인을 상대하느라 그런 것인지 메뉴가 육개장부터 메밀국수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수제비만 팔아서는 이문을 남기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제비만 찾는 사람이 그다지 많진 않기 때문이다. 형 앞에 자리를 잡았다.
수제비가 나오기 전에 작은 보리밥 한 그릇이 상에 올라왔다. 열무김치를 한 젓가락 크게 집었고 참기름, 고추장도 곁들였다. 으깬 마른 고추와 고춧가루를 섞어 살짝 양념한 열무김치는 풋풋한 내음이 차분하게 감돌았다. 입에서 뻣뻣하고 억세게 거친 느낌 없이 또 부드럽게 씹히는데 양념을 한 듯 만 듯한 그 맛에 여러 번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보리밥 작은 그릇이 아쉬웠다. 하지만 곧 작은 항아리에 담겨 나온 수제비를 보고 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
일인분이라고 하기엔 담긴 수제비 양이 만만치 않았다. 수제비는 중국의 완탕처럼 상앗빛으로 반쯤 투명하게 하늘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두껍게 씹히는 수제비가 좋다는데 나는 이렇게 얇은 게 좋더라.” 형은 말릴 틈도 없이 파와 양파, 애호박이 들어간 수제비를 국자로 퍼서 내 앞에 담아줬다. 옅은 갈색빛 국물을 그릇째 들어 마셨다. 오래 우려낸 멸치 국물이 담담하게 위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푹 고아낸 국물에는 가식이 없었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입속에서 펄럭이는 수제비는 사람이 손으로 찢어낸 것이 분명했다. 입안을 이불처럼 폭 감싸는 수제비는 몇 번 씹을 필요도 없이 날아가듯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매일 담근다는 겉절이 김치를 곁들이니 순한 맛 사이로 들썩이는 리듬이 감돌았다. 수제비 항아리 앞으로 만두가 나왔다. 수제비를 찢은 그 손으로 빚은 만두는 물만두보다 살짝 더 컸다. 다진 고기가 실하게 들어 있는 만두는 맛이 튀지 않고 담백했다. 아마 점심이었다면 이쯤에서 식사를 마쳤으리라. 하지만 나를 기다린 형과 바로 헤어지긴 아쉬워 벽에 걸린 메뉴판을 다시 돌아봤다.
늦은 저녁 심심하게 먹기 좋겠다 싶어 고른 것은 감자전이었다. 주문을 넣자 우리 말고 아무도 없는 가게에 감자를 강판에 가는 소리가 울렸다. 주문이 들어오자 그제야 감자를 갈아 부친 그 맛은 먹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일요일도 공휴일도 없이 수제비를 밀고 감자를 가는 마음, 그 마음은 손으로 잡히지 않고 값으로도 매겨지지 않는다. 자학하듯 몸을 부숴가며, 그렇게 스스로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만드는 그 맛에는 거짓도 과장도 없었다.
#왕왕수제비: 수제비 1만원, 접시만두 1만1000원, 감자전 2만원, 02-786-5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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