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 힐링영화가 많아졌다고? 정상적 사회 바라는 대중의 요청

2025. 1. 2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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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마이클 만 감독의 ‘페라리’.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외면하지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엔초 페라리의 여정이 울림을 준다. [사진 CJ ENM]
2024년의 홀로코스트 영화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관사의 일상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담 너머 굴뚝에는 유대인들을 태우는 시체 연기가 너울너울 올라 가고 그 그림자만이 담장 안으로 넘나 들지만 소장 관사 안의 풀에서는 자녀들이 뛰어 놀고 소장의 아내는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긴다. 실로 끔찍한 장면이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평면의 텍스트를 완벽하게 영상의 입체성으로 전환시킨 장면이었다. 칸과 아카데미는 지난해 이 영화에 각각 심사위원 대상과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여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입을 닫았다. 한동안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악은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1억5000만 달러 날린 ‘조커:폴리아되’
올해의 홀로코스트 영화 ‘리얼 페인’. 홀로코스트의 어두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해 비극을 더욱 명징하게 드러낸다. [사진 각 제작사]
2025년의 홀로코스트 영화는 뜻밖에도 ‘리얼 페인’이다. 홀로코스트 투어 이야기이다. 사촌형제지간인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는 할머니 도리가 남긴 약간의 유산으로 여행 계획을 짠다. 교과서에서만 배웠던 홀로코스트 학살 현장을 직접 체험하자는 것이다. 그들은 다 늙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유대인 이민자 자손들과 투어를 시작한다. 영화는 가벼운 여행의 분위기를 앞으로 배치한다. 무거운 홀로코스트 역사는 뒤로 보낸다. 기이하게도 홀로코스트의 어두움을 밝을 곳으로 끌고 나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비극에 대해 좀 더 명징하게 느끼게 해준다. 영화는 데이비드와 벤지의 ‘티키타카’를 펼쳐보이며 점점 이상해지고 삭막해지며 극렬하고 격렬해지는 지금의 세상을 어떻게 하면 치료하고 치유할 수 있는지 그 우회로를 가르쳐 주는데 주력한다. 영화는 종종 세상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건 영화가 지닌 꽤나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태도다. 요즘 한국 극장가에 따뜻한 휴먼 드라마가 넘쳐 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지쳐있고, 쌓인 피로도가 심하기 때문이다.

2월12일에 개봉될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브루탈리즘 건축 양식(극히 단조롭고 간결한 디자인의 노출 콘크리트 양식. 안도 다다오 건축물이 대표적이다.)을 추구했던 헝가리계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안 브로디)의 이야기이다. 라즐로 토스는 가상의 인물이다. 이주민의 아메리칸 드림을 그리는 내용인 만큼 인종차별이나 계층계급의 문제가 꽤나 심각하게 전개될 것 같지만 ‘브루탈리스트’는 그보다 자신의 예술관을 엄격하게 실현해 나가고 자아를 성취하는 인간형, 그 완전주의에 대해 치중한다. 이런 시기와 이런 시대, 이런 세상에서 각각의 개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일상을 유지해 나갈 것인가. 모두 거대한 격류에 휩싸이기만 할 것인가. 그 가운데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완전체에 가깝게 해 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 같은 질문을 담고 있는 내용의 작품이 바로 ‘브루탈리스트’이다.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 곧 감독상을 받았던 작품이다. 얼마 전 열린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남우주연, 남녀조연, 각본상 등 주요 부문 후보로 모두 올랐었다. ‘브루탈리스트’는 사람들이 지금 시대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 일단을 피력하고 있는 작품이다.

올해 골든 글로브 주요부문 후보에 모두 올랐던 ‘브루탈리스트’. [사진 각 제작사]
힐링 영화, 휴먼 드라마 영화들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넘쳐 나는 것에는 산업적인 이유도 있다. 이른바 수퍼 히어로 영화들이 몰락해서다. 마블 영화 시리즈가 대부분 최종장을 마감했거나 새로운 시리즈는 예전만큼의 인기를 모으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어벤저스’ 시리즈는 극중 히어로들 대부분이 사망하면서 이야기를 끝냈다. 이 시리즈는 더 이상 프랜차이즈 영화로서의 기능을 이어갈 수 없게 됐다. 프랜차이즈 영화는 막대한 고비용에 비해 이제 전세계적인 수요가 내리막길이다. 팬데믹의 시대를 거치면서 시장이 요동치는 것을 경험했고 각 나라마다 불안정한 정치경제사회 상황이 시장의 불안정성을 자극하고 있다. 막대한 비용을 들였다가 자칫 복구 불가능한 타격을 입지 말아야 한다는 방어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최대 3억 달러(4500억원)까지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그만큼의 전세계 마케팅비가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돈을 써서 ‘쫄딱’ 망한 영화가 바로 워너 브라더스의 ‘조커:폴리아되’였다. 이 ‘조커2’는 2억 달러를 들였지만 1억5000만 달러를 날렸다. 이는 마이클 치미노 감독이 1980년에 만든 ‘천국의 문’의 기록에 달하는 것이었다. 치미노는 이 영화를 500분짜리의 괴작(怪作)으로 만들어 당시 돈으로 4400만 달러를 썼지만 흥행 수익은 350만 달러에 불과했다. ‘조커:폴리아 되’의 1억5000만 달러 적자와 같은 수준이었다. ‘천국의 문’을 제작했던 유나이티드 아티스(UA)는 MGM에 매각됐고 이후 MGM 역시 유명무실한 영화사가 되고 말았다. 영화 한편으로 산업 전체가 휘청거릴 수 있음을 경험했던 할리우드는 40여 년만에 그 지옥이 ‘조커:폴리아 되’로 재현되는 것을 목도했다. 할리우드가 이후 왜 급격하게 작은 규모의 영화들, 그러나 상대적으로는 부가가치가 높은 휴먼 드라마에 치중하는가를 짐작할 만 하다.

극장은 늘 사회의 목소리 대변하는 곳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어떻게 섞여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사진 각 제작사]
지난해 연말 국내에서 개봉해 5만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탄탄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미국과 아일랜드 합작의 예술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주연인 킬리언 머피가 워낙 눈에 띄는 바람에 또 다른 스타인 벤 에플렉이 기획을 하고 톱스타인 맷 데이먼이 제작을 한 영화라는 사실은 아는 사람만이 안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클레어 키건의 출중한 소설이 기반이 됐지만, 영화가 인기를 모으는 진짜 이유는 실로 격렬할 수 있는 사회적 주제를 시종일관 차분하고 침착하게 정리하고 있는 톤앤매너 때문이다.

주인공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한 수녀원(막달라 마리아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과 학대 사건에 대해 ‘사소한 일’로 치부하지 않고 개입하되, 자신의 용기와 희생을 통해서 이루려 한다. 그 정중동의 애티튜드가 국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맷 데이먼과 벤 에플릭이 2022년에 만든 영화사 ‘아티스트 이쿼티(Artist Equity)’의 작품이다. 이 영화사는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 ‘플랜B’와 함께 현재 할리우드에서 개성 있는 작품을 만드는 중요한 영화사로 주목받고 있다. ‘플랜B’는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게 했던 ‘미나리’의 제작사다. 할리우드의 자본과 시스템 만큼이나 배우 각각의 의지, 그 개인기 역시 중요함을 실증하는 사례들이다.

와카타케 치사코 원작의 소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일본에서 진작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모리의 저녁’을 만들었던 오키타 슈이치 감독은 2021년 7월에 아오이 유우를 내세워 동명의 영화를 발표했다. 이 영화는 각자도생이 세계에서 가장 극대화 돼 있는 일본사회에서 각각의 개인들이, 극단적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섞여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려 한다. 불길하고 암울한, 그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세상살이에서 자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역설한다.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기 위해 조심하되 상대의 자존심도 배려하는 것, 조용하지만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하여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가는 길을 택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영화다. 3년이 넘은 작품이지만 이상하게도 요즘의 한국사회에 강한 울림을 준다.

국내 흥행이 썩 잘되고 있지는 않지만 마이클 만 감독이 만든 작가주의적 레이싱 영화 ‘페라리’도 그런 측면에서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1957년의 이탈리아가 배경이고 전쟁과 파시즘을 겪었으며 게다가 아들까지 잃은 엔초 페라리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은 흐름이고, 결코 그것을 외면하려 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자신대로 혼자서 갈 수 있는 길을 묵묵히 가려고 한다. 페라리는 말한다. “나는 차를 팔기 위해 레이싱을 하는 것이 아니다. 레이싱을 하기 위해 차를 파는 것이다”라고.

지금 한국 극장가에 따뜻한 힐링영화, 차분한 휴먼 드라마가 많아지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이제 그만 사회가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대중의 무언의 요청이자 압력일 수 있다. 늘 극장은 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곳이다. 그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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