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만주벌 호랑이, 청산리대첩 이끈 항일투쟁 영웅

2025. 1. 2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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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⑬ 백야 김좌진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은 1889년 충남 홍주(현 홍성)에서 명문가이자 부호인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집안으로 갑신정변의 김옥균도 문중 인물이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형도 양자로 떠나 장자 역할을 했던 어린 김좌진은 타고난 강골로 말 타기, 활쏘기 등 병정놀이를 즐겨했다. 유년시절 한학을 배웠고 계몽운동가, 의병운동가로부터 신학문을 접하고 시국과 민족문제에 눈뜨게 된다. 1905년 경 10대 가장 김좌진은 집안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민족운동에 나서면서 일가와 함께 홍성의 호명학교(현 갈산초등학교)를 설립했다. 1907년 경 서울로 가 계몽운동단체 신민회 회원들과 교류했고 기호흥학회에도 참여했다.

청산리대첩 일본군 사상 3300여 명 달해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무장항일투쟁을 이끈 김좌진 장군. 장군은 무장독립운동의 선봉에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쳤다. [사진 김좌진 장군 기념관]
1910년 경술국치 후 김좌진은 동지를 규합해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행동에 나선다. 연락거점으로 이창양행 등을 설립하고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1911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출옥 후 1915년 박상진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김좌진이 자금모집활동 중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되자 광복회는 그를 사관학교 설치와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치한 만주본부를 책임지는 부사령으로 임명한다. 1918년 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한 간부회원들이 일제에 체포되어 광복회가 와해된 후 김좌진은 길림에서 1919년 2월, 독립운동가 39인이 독립전쟁을 선포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데 참여했다.

3·1운동 이후 무장독립군단체들이 활동하는데 서간도 지역의 서로군정서, 북간도 지역의 대한정의단(후에 대한군정서, 통칭 북로군정서)이 대표적이다. 김좌진은 서일 총재의 초빙으로 대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대한정의단에 참여한다. 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나서 사관양성소 소장을 겸임하면서 300여 명의 생도들을 교육했고 일반병사들로 구성된 보병대도 조직했다. 김좌진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군의 무기를 구입토록 해 대한군정서군은 총 4개 대대 1600여 명이 총기 800정, 기관총 4정, 야포 2문, 수류탄 2000여 개로 무장하고 만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독립군 세력으로 성장했다.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은 유격전으로 국내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고 일본군은 국경을 넘어 독립군 근거지로 공격해왔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연합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가 500명에 달하는 대승을 거두는 등 독립군단체들은 곳곳에서 활약했다. 그해 8월 일제는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해 서·북간도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당시 중국 측이 독립운동단체들의 근거지 이동을 요구해 대한군정서군은 의견대립 끝에 총재 서일은 북만주로, 총사령관 김좌진은 서쪽의 화룡현 청산리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즈음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연합부대를 편성한 독립군부대들이 청산리에 집결해 있었고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군이 도착해 2000여 병력이 모여 작전을 함께 협의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은 2만여 병력으로 독립군을 포위해 화룡현으로 진격해왔고,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에서 북간도 독립군부대가 일본군과 10여 차례 전투에서 대승한 것이 바로 ‘청산리대첩’이다.

10월 21일 ‘백운평전투’에서 600여 명의 김좌진부대가 일본군 보병연대를 계곡으로 유인해 일본군 300여 명이 전사하는 대승을 거뒀다. 독립군 전사자는 20여 명이었다. 10월 22일 ‘천수평전투’에선 일본군 기마중대를 급습해 120여 명을 전멸시켰다. 같은 날 ‘어랑촌전투’에서 먼저 고지를 점령한 김좌진 군대 600여 명은 기병·포병·보병이 연합한 6배 이상의 일본군 대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중과부적으로 고전하던 중 ‘완루구’에서 승리한 후 이동하던 홍범도부대가 지원에 나서 함께 일본군을 격퇴시켰다. 일본군 전사자가 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어 벌어진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에서 연이어 김좌진부대가 승리를 거두었고, 10월 26일 ‘천보산전투’에서 김좌진·홍범도부대가 연합해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 대첩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200여 명, 부상자는 2100여 명이었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30여 명, 부상자 220여 명이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중국 길림성 해림현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순국 장소. 장군은 이곳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사진 김석동]
훈련된 정예 무장독립군들의 항전의지, 김좌진의 탁월한 지도력, 홍범도부대의 지원 등이 있었지만 오랜 기간 자금과 군수지원은 물론 숙식을 제공하며 첩보활동까지 담당한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역사였다.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그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일본군은 북간도에서 잔혹한 보복·압박을 계속했고 경신참변(간도참변)으로 학살된 동포가 3600여 명에 달했다. 청산리대첩 후 일본군이 본격 공격해오자 독립군세력은 연해주로 건너가 장기항전 하기 위해 중·러국경 밀산에 집결해 러시아 이만으로 이동했고 김좌진부대, 홍범도 연합부대, 서로군정서군 등 3000여 명의 독립군이 집결했다. 독립군부대들은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 참모부장에 김좌진을 선출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극동공화국 측에서는 독립군부대가 북쪽 자유시로 옮기도록 하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무장해제된 독립군부대들은 내부 갈등 끝에 러시아 적군 측 공격으로 최대 500여 명이 사망하는 ‘자유시참변’을 당하게 된다. 무장해제를 반대한 김좌진이 일부 대한군정서군을 이끌고 북만주로 돌아간 후였다. 자유시참변 후 서일 총재가 자결 순국했고, 김좌진은 대한군정서를 이끌고 1922년 북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들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해 이범윤이 총재를 맡고 김좌진은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군사부문을 책임지게 된다.

일본의 만주출병과 만주군벌과의 협력 등의 상황이 전개되자 독립운동단체들은 통합을 모색한다. 압록강 인근에는 참의부로, 남만주 지역에는 정의부로 독립운동세력들이 통합되자 김좌진도 1925년 북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해 신민부를 창립하게 된다. 임정은 김좌진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1920년 청산리대첩 승전 사진. 청산리에 집결한 독립군부대들과 김좌진 장군의 대한군정서군은 일본군과 10여 차례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사진 위키백과]
신민부는 북만주 최고의 독립운동단체로 자리 잡아갔지만 1927년 일제와 중국경찰이 본부를 급습해 간부들을 체포하자 민정파와 군정파로 분열되고 김좌진은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어 군정파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강제 모병·모금 등에 대한 동포사회의 반발, 공산세력의 확산 등으로 신민부에 대한 지지는 크게 약화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를 지향하며 무장투쟁을 추진해 온 김좌진은 개인의 자유, 동포의 생활개선 등을 추구하는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하며 ‘재만조선무정부주의연맹’과 연합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장이 된다. 이후 동포들의 자치조직결성, 생활개선, 영농지원, 교육 등을 지원하고 이를 토대로 공산주의에 대응하며 무장투쟁의 기반을 닦아나갔다.

1930년 1월 24일 독립투쟁에 매진하던 김좌진은 뜻밖에 동포지원을 위해 운영하던 해림의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에 맞아 숨진다. 청산리대첩의 영웅이자 무장항일투쟁을 이끌었던 대표적 지도자, 만주벌 호랑이 김좌진은 이렇게 순국했다. 암살배경에는 공산세력과의 갈등 외에 일제가 배후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국내외에서 10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해 사회장이 거행됐고 인근에 안장되었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이어지자 1934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유해를 고향 충남 홍성으로 옮겼고, 1958년 아들 김두한이 충남 보령으로 이장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홍성에는 추념비, 동상이 세워지고 생가지가 복원됐다. 1999년 순국지인 해림에도 자택과 정미소가 복원되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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