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석유의 시대’ 열겠다는 트럼프, 취임 첫날 파리기후협약 탈퇴
‘친환경’ 지우고 WHO도 탈퇴…국경 장벽 건설 재개·난민 입국 중단도 공언
(시사저널=김하늬 미국 통신원)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고 4년 만에 다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 첫날은 충격과 공포, 파격과 논란의 연속이었다. 역대 대통령과 달리 성경에 손을 올리지 않은 취임선서부터 시작해 지지자들 앞에서 무더기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펜을 던져주는 퍼포먼스까지 '트럼프다운' 파격적인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내용도 뒤지지 않았다. 취임사, 46개 행정명령, 기자회견 등을 통해 그간 줄곧 공언해온 조치를 구체화하고 실행에 착수했다. 파리기후협약·세계보건기구(WHO) 동시 탈퇴, 파나마 운하 회수, 멕시코·미국 국경에 대한 비상사태 선포 등 하나같이 아찔한 조치들을 쏟아냈다.
무더기 행정명령 중 가장 큰 관심을 끌었던 행정명령 1호는 '바이든 지우기'다. 바이든 전 대통령의 행정명령 78건을 한꺼번에 철회했는데 그간 실시한 '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폐기가 핵심이다. 여기엔 인종 및 성차별 금지 조치, 이민, 기후와 관련된 조치들이 포함돼 있다. 특히 트럼프 1기 당시 탈퇴했다가 바이든 행정부에서 복원된 국제협정 탈퇴를 또 감행했다.
4년 전 바이든은 취임 첫날 파리기후협약에 복귀하고 WHO 탈퇴 절차 중단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바 있다. 일부 이슬람 국가에 대한 미국 입국 금지 조치를 철회하고, 미국 남부의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을 위해 선포된 비상사태 효력을 중단시켰다. 4년 후,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가 돌려놓은 경제와 이민, 각종 사회 이슈와 관련된 정책의 큰 물줄기를 또다시 바꿔놓았다. 취임 첫날 내리는 행정명령은 새 정부가 국민과 세계를 향해 변화와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정치적 행위임을 감안할 때 다시 한번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셈이다.
"멕시코만 이름 미국만으로 바꾼다"
외교적 논란이 되는 사안들도 직설적으로 공언했는데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바꾸고, 북미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알래스카 디날리산의 이름은 윌리엄 매킨리산으로 변경했다. 매킨리는 미국의 25대 대통령의 이름으로 강력한 보호무역 기치 아래 높은 관세를 부과한 인물이다. 뉴욕포스트는 "윌리엄 매킨리는 관세 정책과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트럼프에게 영감을 줬다"고 설명했다.
트럼프는 파나마 운하의 통제권도 되찾겠다고 밝혔다. 그 명분으로 "중국이 파나마 운하를 운영하고 있다"며 "우리는 중국에 운하를 준 것이 아니며 되찾을 것"이라고 했다. CNN은 "파나마 운하와 그 주변의 인프라에 대해 중국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타당한 의문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운하 자체는 1999년 미국이 파나마에 운영권을 넘긴 이래 파나마 운하 관리청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미 언론들은 사실관계 여부와 상관없이 멕시코만, 파나마 운하, 매킨리 전 대통령까지 취임사에서 거론한 이름 3개는 앞으로 영토 확장의 트럼프식 대외 정책 의지를 명확히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로이터통신은 "트럼프가 취임사에서도 현대판 제국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을 쏟아냈다"고 지적했다.
파리기후협약 탈퇴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는 중국을 거론했다. 트럼프는 "중국은 여전히 오염물질을 배출하며 그 영향이 미국까지 미친다"며 "모두가 함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더 이상 우리 산업을 스스로 망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현재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온실가스 배출국이지만,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하고 석유 및 가스 시추를 늘리겠다고 다시 공언했다. 파리기후협약은 2015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 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채택된 국제협약으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각국이 자발적으로 감축 목표를 설정하고 이행해야 한다. 탈퇴가 공식화하면 미국은 이란, 리비아, 예멘 등과 함께 파리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4개 나라에 속하게 된다.
트럼프 취임에 맞춰 새로 개편된 백악관 홈페이지에는 우선 추진 과제 중 하나로 불법 이민 단속을 포함한 '국경 안전 강화' 문제도 꼽혔다. 트럼프는 대선 기간 내내 불법 이민자 문제를 주요 이슈로 다뤘는데 그가 내세운 불법 이민자 해법은 '추방'이다. 실제 행정명령을 통해 남부 국경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군을 국경에 배치하는 한편 국방부에 국경을 봉쇄하고 주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실행계획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며 반(反)이민 정책을 본격화했다.
그간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가 남부 국경을 열어 불법 이민자와 강력 범죄자가 대거 유입됐다는 주장을 되풀이해 왔다.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 이민자 가운데는 어린이나 범죄 기록이 없는 이들도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를 "수백만 명의 범죄자 외국인들"로 지칭하며 물리쳐야 할 '악'으로 규정했다.
취임 바로 다음 날 이민자 단속 개시
실제 취임날 오후 12시를 기준으로 미 당국의 이민 사전 인터뷰 예약 애플리케이션(앱) '시비피 원(CBP one)'의 운영이 종료됐다. 시비피 원 측은 "1월20일부터 비등록 외국인이 남서부 국경 8개 검문소에서 사전 정보를 제공하고 이민 사전 인터뷰 예약을 할 수 있었던 기능을 사용할 수 없다"며 "기존 예약도 취소됐다"고 밝혔다. 이 앱은 바이든 행정부에서 입국·망명 신청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2021년 초 출시한 앱으로, 이를 통해 작년 말까지 총 90만 명 이상의 이민자가 입국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앱의 갑작스러운 종료로 이민자들은 대혼란을 겪었는데 취임식 당일 오전 기준 약 3만 명의 이민자가 해당 앱을 통해 미국 입국 예약을 시도했다.
취임 바로 다음 날에는 미국에 불법으로 들어와 체류 중인 이민자에 대한 단속을 개시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경 차르'인 톰 호먼 전 이민세관단속국(ICE) 국장 직무대행은 1월21일 전국 곳곳에서 불법 체류자 단속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ICE는 범죄 경력이 있는 불법 체류자를 주로 단속할 계획이지만 단속 과정에서 범죄 경력이 없는 불법 입국자를 발견할 경우 그들도 함께 체포한다는 방침이다. ICE 요원이 교회, 학교와 같은 '민감한 구역'에서 단속 활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는 지침도 발표됐다.
이 밖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1기 때처럼 법원 결정 전까지 이민·망명 신청자들을 멕시코에 머물도록 하는 '이민자 보호 프로토콜'을 복원할 계획이다. 멕시코는 취임 다음 날 즉각 대응 전략을 발표했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국경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병력 배치를 강화하는 내용의 트럼프 행정명령은 1기 정부 때와 매우 유사한 내용"이라며 "우리는 이미 그걸 겪어봤고, 그 시기를 살아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도주의적 추방자 수용 정책을 공개했는데 11개의 송환 포인트를 설치해 미국에서 추방된 이들을 맞는 내용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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