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주세요" 다급한 여자 목소리에 나가보니

김인철 2025. 1. 2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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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일어난 지하 셋방 보일러 동파 사건... 오랜만에 이웃 노릇 했습니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인철 기자]

겨울에 한파가 찾아오면 집에서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게 많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게 보일러와 수도 관리다. 지난해 한파가 몰아치던 날 보일러 배관이 어는 바람에 상당히 고생을 했다. 수도와 보일러 동파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주방에 있는 수도꼭지를 조금씩 틀어놓는다.

지난주 일요일 오후였다.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판매 사원이거나 전도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밖에선 굉장히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파된 보일러에서 물이 콸콸콸

나는 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내 앞에는 꽃무늬 운동복 차림을 한, 20대 중반의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같은 건물 지하층에 사는 여성이었다. 이웃으로 산 지는 오래되었지만 서로 잘 모르고 안면만 있는 사이였다. 여자는 상당히 놀란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는 태도였다.

"무슨 일이세요?"
"그게.... 그게.... 지금 저희집 보일러에서 물이 막 엄청 새는데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어요.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네? 보일러에서요?"
"네. 지금 콸콸 새고 있어요."
▲ 보일러 우리집 보일러다. 지하층 세입자의 동파된 보일러와 같은 모델이다.
ⓒ 김인철
여자의 말 대로 지하로 내려가니 현관 옆에 설치된 보일러에서 물이 콸콸 새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은 보일러에서 쏟아진 물로 흥건했다.

"어휴, 큰일이네. 보일러가 동파 된 것 같은데."
"그럼 어떡해요."
"보일러 주변에 잠금밸브가 있을 텐데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니요... 모르겠어요."

보일러 주변을 찾았지만 수도 잠금밸브가 없다. 순간 나도 머리가 하얘졌다. 보일러에서는 물이 더욱 콸콸 솟으며 바닥으로 흘렀다. 급한 마음에 119에 전화를 했다. 보일러 수도가 터졌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물었더니 그건 자기도 어떻게 해줄 수 없다며 건물주한테 물어보라고 했다.

두 눈이 벌게지도록 우는 여성

건물로 들어오는 수도를 잠그면 될 것 같았다. 수도 밸브 위치를 확인했다.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수도 밸브를 잠갔다. 하지만 물은 계속 흘렀다. 난감했다.

다행히 시간이 좀 지나니 콸콸 흐르던 배관에서 물이 멈췄다. 여자는 갑자기 터진 보일러에 당황스럽고 겁이 났던지 두 눈이 벌게지도록 펑펑 울었다. 보일러가 얼었다 녹으면서 배관중 하나가 터진 것 같았다.

"요즘 보일러를 안 틀었나봐요?"
"네, 좀 오래됐어요."

"보일러가 얼었다 녹으면서 배관 하나가 터진 것 같아요."
"그런가요. 몰랐어요. ...사실 집에 전기도 안 들어온 지 좀 됐어요. 벽 어디선가 합선이 된 것 같은데 공사비가 많이 나올 것 같아서, 나중에 돈 생기면 고치려고.... 제가 지금 조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여자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는 듯싶었다. 우편함에 항상 들어있던, 여자의 이름이 적힌 청구서가 떠올랐다.

"네?.... 그럼 이 추운 날씨에 어떻게 지내요?"
"그냥 옷 두껍게 입고 이불 덮고 자고 있어요. 그런데 전체 수도를 잠가서 오늘 다른 분들이 물을 못 쓸 텐데 어떡해요?"
"방법을 찾아 봐야죠. 너무 걱정 말아요."

잠시 후 외출했던 집주인 내외분이 오셨다. 보일러가 터진 상황을 보시더니 두 분도 무척 놀라고 안타까워하셨다. 다른 세입자들도 상황을 알고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집주인이 울고 있는 여자를 꼭 안아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켰다. 집주인 내외분은 캐나다에서 살다가 몇 년 전 여생을 보내시려고 귀국을 했다. 날은 점점 어둑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도 시리고 발도 시리다. 경황이 없었던지 슬리퍼에 양말도 안 신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쓰는 물건들은 가능하면 고쳐서 쓰자는 주의다. 보일러는 전문적인 수리는 힘들지만 임시 조치가 가능할 것 같았다. 보일러와 연결된 배관을 자세히 살펴보니, 배관 4개 중 한 곳이 살짝 휘어져 있었다.

배관을 감싸고 있던 스티로품을 벗겨내니 작은 구멍 두 개가 보였다. 얼었다가 터진 모양이다. 집주인이 수리 기사를 알아보셨다. 하지만 당일이 일요일이라 보일러 기사는 다음날에야 올 수 있다고 했다.

"이 배관 부위만 막으면 누수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에요. 당장 저녁에 물을 써야 하는데."

배관이 터진 부분만 막으면 밸브를 열어도 적어도 하루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서 공구통을 가져와 글루건으로 심을 녹인 다음 배관이 터진 부위를 덮었다. 굳을 때까지 기다린 후 건물로 들어오는 수도 밸브를 조금 열었다. 다행히 배관에서 물이 새지 않는다. 밸브를 조금 더 틀어봤다. 괜찮았다.

여성도, 근심 가득하던 집주인 내외분도 표정이 밝아지며 반색을 한다.

"아저씨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고 다행이네. 고생했어요. 이제 보니 기술자였네, 기술자. 내일 기사 불러서 보일러 수리하면 되니까 걱정 말아요."

얼굴이 퉁퉁 부은 여자도 보일러에서 더 이상 물이 새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 안심이 되었는지 근심 가득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주인아주머니가 밤이 늦도록 여자의 방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것도 도와주셨다.

"아저씨, 오늘 고마웠어요. 힘이 많이 됐어요. 제가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이 추운 겨울을 밤새 어떻게 견뎠을까? 같은 건물에 살면서 나도 참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다음날 보일러를 수리하고 그 다음 날은 합선된 전기를 고쳤다. 집주인이 보일러 수리와 전기 공사에 신경을 많이 써줬다.

'보일러 소동'이 우리에게 남긴 것

이튿날 저녁이 되자 언제부터 멈췄을지 모를 보일러 연통에서 흰 수증기가 나오고 항상 꺼져 있던 지하 창문에서 불이 켜졌다. 보일러를 고치고 전기도 고치며 평온을 찾은 여자는 고맙다며 내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 했다.

"아저씨, 혹시 저녁 식사 하셨어요?"
"아직요, 지금 준비 중이에요."
"제가 지금 저녁 먹으려고 제육볶음을 사 오려고 하는데, 아저씨 것도 하나 포장해서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제육볶음을 주었다. 바나나 우유와 배 음료도 함께 들어 있었다. 제육볶음은 매우 맛있었다. 부드러운 식감의 바나나우유와 배 음료도 달달하고 시원했다.
▲ 제육볶음 지하층 이웃 여성 세입자분이 동파된 보일러에서 물이 세는 것을 해결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제육볶음과 음료를 사주었다.
ⓒ 김인철
연일 추운 날이다. 겨울은 여전히 서슬 퍼렀고 봄은 아직 멀리 있다. 몸은 춥지만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마음이 따스하고 풍성했다. 보일러에서 물이 새는 작은 소동이 데면데면하던 이웃의 소중함과 따스함을 알게 된 좋은 계기였다.

아저씨, 아저씨. 원빈과 이선균이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아저씨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긴 했지만, 직업상 언제나 아이들에게 '선생님' 소리만 듣던 내가 현실에서 아저씨 소리를 듣는 게 생경하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사실 생물학적인 나이는 할아버지 소리도 들을 나이이긴 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번외 편으로 단막극 한 편을 현실에서 찍은 듯했다. 이선균이 아이유에게 '나의 아저씨'였다면 나는 그냥 옆집 아저씨에 불과하지만.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다음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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