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에 집착한 혈통 관리…병들고 버려지는 경주마들 [김지나의 그런데 말(馬)입니다]

김지나 아마추어 승마선수 2025. 1. 2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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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드 극대화 위해 철저히 이용되는 ‘서러브레드 종’의 피
천성 거스른 억지 기준에 기형‧출혈 등 고통…끝내 버려져

(시사저널=김지나 아마추어 승마선수)

서러브레드 종으로 18세기 영국에서 활약했던 전설적인 경주마 이클립스 ⓒGeorge Stubbs의 그림

경마에서 달리는 말은 대부분 '서러브레드(Thoroughbred)' 품종이다. 철저하게(thorough) 교배되었다(bred)는 이름 뜻만큼 매우 까다롭게 혈통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유명하다. 뛰어난 경주마는 황금알을 낳는 오리나 다름없다. 수십억원에 달할 수 있는 그 금전적 가치를 위해, 사람들은 지난 300여 년 동안 서러브레드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번식을 조절해왔다.

서러브레드 종의 혈통 관리는 단지 다른 종과 교배하지 않는다는 의미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경주마로서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품종 개량이었다. 서러브레드 고유의 민첩하고, 빠르며, 뜨거운 기질은 경마가 등장한 이래 점점 더 발달되어 온 것이다.

우리가 '한라마'라고 부르는 종은 이 서러브레드와 제주마를 교배시켜 태어난 말이다. 제주도 경마에서는 2022년까지 제주마 혈통이 섞인 말만 출전할 수 있었다. 제주 경마를 활성화해 제주마를 보존한다는 명목이었는데, 몸집이 작고 속도가 빠르지 않은 제주마만으로는 경마 흥행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말 생산자들은 오로지 경주를 위해 개량돼 온 서러브레드의 피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탄약을 운반하던 군마들의 모습 ⓒ김지나 제공

유흥이 된 경마, 강해진 속도 집착…한계와 싸우는 말들

사실 말 가치를 스피드로 평가하는 것은 꽤나 부자연스러운 관점이다. 지금처럼 기계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말이 사람과 함께 살며 어떤 역할을 해왔었는지를 생각해보자. 기껏해야 시속 10~20km 정도로 마차를 끌었고, 밭을 가는데 동원됐다. 전근대 시절 말이 가장 돋보이는 순간은 군마로 활약할 때였는데, 말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를 태우거나 수십kg 탄약을 운반하는 오늘날 탱크와 같은 존재였다. 속력보다는 용맹함과 인내심, 상황 판단력 등이 더 중요한 자질이었다.

그러나 이런 역할들이 대부분 산업용 기계로 대체되며 중요한 자산으로서 말의 가치를 뽐내기 위한 자리였던 경마는 점차 유흥과 쾌락의 장으로 변질됐다. 속도전만큼 짜릿한 볼거리가 또 어디 있을까. 이 욕망에 부흥하고자 서러브레드 종은 경주에서 이기기 위해 빠르게 달리는 능력만을 선택적으로 발달시키는 방식으로 교배됐다. 그리고 그 결과, 말 신체구조가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속력을 내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게 현대 서러브레드들은 단 몇 분간 폭발적으로 달릴 수 있는 신체 기능만 가진 채, 매우 높은 사고 위험율과 함께 여러 가지 건강 문제를 달고 살게 됐다. 경주를 한번 뛰고 나면 한 달을 쉬어야 몸이 회복된다고 한다. 또 고질적으로 '운동기인성 폐출혈'이라고 하는, 무리한 달리기로 인해 손상된 폐 조직에서 출혈이 발생하는 증상에 시달린다. 경주를 뛴 후 50~70%에 달하는 말들에게서 이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니, 정상적인 상황 같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생식력 저하, 기형적으로 작은 심장, 몸집에 비해 너무 작은 발굽 크기 등의 건강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다.

경주에 나서는 말들에게는 나이나 성별, 유전적 특징과 같이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실력 차이를 줄이기 위해 저마다 '부담중량'이라는 것이 책정된다. 각종 장비들과 기수 몸무게를 포함해 말이 짊어지고 뛰어야 하는 무게다. 이 부담중량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인데, 그만큼 서러브레드 종이 허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옛날에는 3km 내외의 장거리 경주도 많았지만 이제는 1~1.7km를 달리는 단거리와 중거리 위주로 경기가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말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속도에 집착하다보니 말 역량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을 뿐이다. 천성을 거스른 억지스런 기준을 만들어내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 행태가 흡사 전족(纏足)을 연상시킨다.

경주마들이 공정한 경기를 위해 짊어지고 뛰어야 하는 '부담중량'을 맞출 때 사용하는 무게추 ⓒnews.paddypower.com

몸집 기준 맞추려 굶기고 발굽 깎이는 한라마

제주 경마장에서는 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서러브레드 피가 섞인 한라마들은 당연히 제주마들보다 몸집이 클 수밖에 없는데, 제주마에 맞춘 체고 기준 때문에 일부러 굶기거나 심지어 발굽을 과도하게 깎아내기까지 하는 일들이 나타났다. 그래서 2023년부터는 제주 경마에 한라마 출전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농가에서 경마 수익을 바라보고 생산해낸 수많은 한라마들을 활용할 방안이 없어 도축하거나 야산에 방치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이다. 미봉책에 미봉책이 이어지는 본새가 그저 우스꽝스럽다.

혈통 관리란 것은 온전히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울일 뿐이다. 최근 경주퇴역마 복지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긴 했지만, 기이하기 짝이 없는 현역 경주마 생산에서부터 근본적인 문제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서러브레드가 이렇게 강박적으로 품종 개량이 되지 않았다면 은퇴 이후 경주마들 삶에 조금 더 많은 가능성과 기회가 주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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