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과 망상 세력 앞, 언론의 두 가지 선택지 [정준희의 ‘미디어 레퀴엠’]

정준희 2025. 1. 20.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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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와 언론에서 지난 한 달간 벌어진 일은 보편 가치의 훼손이다. 윤석열과 그 일당이 벌이는 반동의 역사는 언론에 의해 사회적 현실로 승인받았다.
1월4일 탄핵을 반대하는 윤석열 지지자들이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한국 언론의 정파성에 대해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나는 완고한 중립주의자도 아니고, 애초에 완전히 비정파적인 언론이 성립하기란 원리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기간 저널리즘의 금과옥조는 적어도 ‘과잉한’ 정파성을 문제적인 상황으로 인식해왔다. 그래서 고심했다. 정파성을 없애는 게 아니라 정파성의 나쁜 부분을 통제할 방안이 과연 있을까 하고.

그렇다면 ‘과잉’의 기준이 무엇인가가 중요했다. 첫 번째는 정파성에 눈이 멀어 사실을 사실로 취급하지 않는 것. 자신의 정파성에 매몰되어 중요한 사실을 못 보고 넘어가거나, 의도적으로 은폐, 심지어 왜곡하는 일은 피할 수 있고 피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해왔다.

두 번째는 정파적 판단이 작동을 멈춰야 하는 순간에조차 정파성을 발동하는 것. 정파성 바깥에 존재해야 하는 대상은 사실 외에 해석과 판단의 영역에도 있다. 이른바 ‘국익’이라고 종종 이야기되는 것이 그러한데, 이 개념 자체가 워낙 자의적이라, 그것을 일종의 보편 가치라고 해두자. 정치 바깥의 여러 사안들, 그리고 정치에 걸쳐져 있다고 하더라도 인도주의적 원칙이나 헌법적 가치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특정 정파의 견해만을 중시한 채 다른 정파의 견해는 철저히 배제하는 것. 세상이 어떤 정파의 목소리만으로 채워지는 게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언론이라면 복수 정파의 목소리가 ‘존재’함을 인지하여 전달할 필요가 있고, 가능한 한 그 목소리의 크기와 비중에 맞게 시선과 중요도를 할당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왕이면 서로 다른 정파적 목소리와 견해 가운데 좀 더 합리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쪽을 가늠해주는 게 좋다.

네 번째는 자신의 정파성을 숨기고 마치 전혀 정파적이지 않은 양 행동하는 것. 방송 언론의 경우 노골적인 정파성은 규제의 대상이 되니 어느 정도는 비정파적 외양을 띠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신문 언론이 자신의 정파성을 숨기는 건 규제를 피하는 것 이상의 실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익은 사실상 독자들에 대한 ‘사기’와 ‘기망’ 행위로 얻어진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는 흔히 ‘사실과 의견의 분리 원칙’이라 하고, 두 번째는 ‘보편 가치 존중의 원칙’이라고 한다면, 세 번째는 ‘균형성의 원칙’, 네 번째는 ‘투명성의 원칙’이라 할 만하다. 우리 저널리즘이 처한 신뢰성의 위기에 대해 저널리스트들에게 물었을 때, 이들 다수는 한결같이 이런 ‘과잉 정파성’을 언급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정말로 그걸 고민하고 걱정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투명성의 원칙을 지키는 언론을 찾아보기란 정말 쉽지 않으며, 균형성이라는 명목하에 지극한 불균형만 실천하기 일쑤이고, 그들이 그렇게나 중시하는 사실이 정말로 엄중한 사실로서 취급되는 경우를 점점 더 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두 쪽으로 갈라졌다” 쉽게 말하지만

최근 들어서 드는 확신은, 이들이 문제 삼는 과잉 정파성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것일 때만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특히 주류 언론의 입장에서 비주류 언론을 타박할 때에만 유효하다. “나는 모르겠고, 너는 확실히 더럽다”는 식이다. 실제로 누가 더 과잉한 정파성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별하여 말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제각각 인상비평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이 지목하는 비주류 언론은 그나마 투명하기라도 한데, 주류 언론의 대다수는 투명성의 원칙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논의를 출발해야 한다. 과잉 정파성을 논하려면 이 부분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그나마 바람직하고 실천적일 터이다.

1월6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45명이 윤석열 체포영장 집행을 막기 위해 대통령 관저를 찾았다. ⓒ연합뉴스

다른 한편, 느닷없는 계엄 선포 이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국회 의결을 거쳐 윤석열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1차 집행에 실패한 시점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치와 언론에서 지난 한 달간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상한 것은 ‘보편 가치의 훼손’이다. 앞에서 인도주의적 원칙이나 헌법적 가치를 그 예로 들었다. 우리는 이것을 종종 ‘상식’에 견주어 해결하려 하지만, 상식은 매우 흐릿한 개념이며, 여론조사로 포착되는 다수성에 의존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보편 가치는 당대의 상식을 가치화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가치를 오랜 시간에 걸쳐 상식화하고 내면화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적 진리 지향’에 해당한다. 따라서 보편 가치는 선포되는 것이고, 최상위 가치 규범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최상위 가치 규범에 위배되는 행동은, 적어도 다른 종류의 최상위 가치 규범이 등장하여 재각인되는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적극적으로 비난받거나 의도적으로 침묵시키거나 필요에 따라 강력히 처벌되어야 한다.

윤석열의 내란 시도에서 체포 거부에 이르기까지 윤석열 본인과 그를 둘러싼 대통령실, 경호처 그리고 국민의힘은 이런 보편 가치에 대한 일말의 존중을 보여주기는커녕 그 보편 가치를 ‘정쟁화’하는 일, 즉 정치적 다툼의 여지가 있는 사안인 것처럼 취급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주류 언론의 꽤 많은 주체들이 이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동조하고 또 전파하는 데 일조한다. 대통령과 대통령 반대 측, 그리고 여당과 야당이 ‘정쟁’에 빠져 있고, 이에 따라 시위도, 국민도 “두 쪽으로 갈라졌다”라고 즐겨(!) 말한다.

즉자적 현상으로만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실제로 양대 집단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즉자적 현상을 의미 있는 사회적 현실로 변환시키는 언론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윤석열과 그를 둘러싼 일파들의 주장은 존중받아야 할 사회적 의견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집단의 ‘개소리(bullshit)’에 불과하다. 분석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가 자신의 저서 〈개소리에 대하여〉를 통해 정립한 이론에 따르면, 개소리는 듣는 이가 말하는 이에 대해 ‘특정한 인상’을 가지게 하려는 목적을 띤다. 즉 진실이 무엇인지는 상관없이 자기의 영향력 확대만을 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석열 일파가 온갖 개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나는 여기 살아 있다,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고 흩어지지 말고 집결하라”는 인상을 남겨 영향력을 지키고 확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개된 과정만 놓고 보면 이들의 목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대통령 호위무사들은 자신들이 마치 외로운 전제군주를 지키는 근위병이라도 된 양 굴고 있으며, 헌법과 법률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이들은 ‘전하에 대한 결사옹위’ 깃발 아래 모여들고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은 전임자가 행했던 온갖 비정상적 거부권 행태를 이어받음으로써, 헌정 질서의 ‘현상 유지’가 아니라 사고 상태에 처한 대통령의 ‘영향력 유지’가 자신이 대행할 권한의 전부인 양 행동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박근혜 탄핵 당시와는 달리 결사항전의 자세로 대통령 주변에 ‘가까이, 더욱더 가까이’ 모이라고 외치면서 도무지 정상적인 민주정당이라고 볼 수 없는 희대의 개소리를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한 달 동안 이뤄진 이 반동의 역사는 이를 ‘사회적 현실’로 승인한 언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1월2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극우 유튜버들이 생방송을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저널리즘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라도, 나는 언론들이 보여주고 있는 이 무기력을 넘어 사악하기까지 한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1월3일 체포영장이 1차 집행되기 전 대통령 관저가 있는 서울 한남동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윤석열이 배포한 메시지를 보라. 윤석열은 “실시간 생중계 유튜브를 통해” 이 모든 내용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보고 있다는 유튜브가 기성 언론의 영상이 아니라는 건 굳이 일일이 확인하지 않아도 명백하다. 그는 계엄 선포의 배경이 된 ‘부정선거론’의 근거로 기성 언론의 취재와 문제 제기를 들지도 않았다. 그를 확신으로 이끈 건 극우 유튜브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키워온 개소리였다.

기성 언론 당신들이 무얼 하건, 국가의 최고 책임자라는 이는 자신을 확신으로 이끌어주는 망상의 미디어 세계에 빠져 있고 그걸 깨고 나올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결국 당신들에게 주어진 길은 두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극우 유튜브와 한 몸이 되어 망상의 경쟁을 벌이거나, 저 망상 세력과 단호하게 단절하거나.

민주주의 있어야 언론 생존 가능하다

전자를 택한다면 장담컨대 이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과 경쟁하여 지도력을 되찾기란 어려울 것이고, 설혹 윤석열 일파의 생존과 귀환에 도움을 준다 한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물론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도 길이 순탄치는 않을 테다. 당신들이 이 세력을 더 이상 ‘정치의 한 축’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 망국적 망상 연합으로부터 등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갑자기 모든 걸 반성하면서 당신들의 정보와 의견을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당신들의 어정쩡함을 경험한 시민들이 여간해선 신뢰를 되돌려주려 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도 당신들은 그 망상 바깥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그 현실 안에서 이 망상 세력을 어떻게 배제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구조적 신뢰 위기에 처한 저널리즘의 한 끄트머리라도 살려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언론이 민주적 헌정 질서에 대해 비타협적이고 선명한 태도를 보여줘야 하는 이유는 윤석열이 내걸었던 계엄령 포고령 제1호를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언론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이전에, 민주주의가 있어야 언론이 언론으로서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구조 변동에 의해 기성 언론 체제가 붕괴되더라도, 무언가 다시 세울 토대나마 남겨두어야 재건축을 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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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 (한양대 정보사회미디어학과 겸임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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