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53. 풍수전쟁, 12.3 반란을 저지하다

손건웅 2025. 1. 1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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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3일 밤, 윤석열은 위법적 비상계엄령을 선포한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과 같았다. 수 많은 시민(특히 20.30)들이 국회로 몰려나왔고, 가냘픈 여성의 손길이 계엄군의 총구를 막았다. 젊은 병사들도 자제력을 유지했다. 이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출입문이 차단되자 담장을 넘는 투혼을 발휘하며 의사당으로 향하는 의원들은 헌법기관다운 행동이었다. 계엄군의 회의장 진입을 몸으로 막아냈던 보좌관들의 기개도 돋보였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190명의 국회의원들은 계엄령해제를 가결시켜 폭주하는 권력에 제동을 걸었다.

국회상황을 지켜보는 수 많은 국민들은 긴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12.3 반란의 개연성을 사전에 경고했고, 이후의 상황을 수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분들의 선영을 소개한다.

 

■우원식 선영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우원식은 담장을 넘어 의사당으로 들어갔다. 12월 4일 4일 새벽 1시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안을 상정했고, 190명 참석 의원들이 전원 찬성으로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계엄군이 진입하는 상황에서 우의장의 행동은 답답하게 비췄다. TV를 시청하는 국민들은 애간장이 녹아들었다. 그러나 국회가 정한 절차에 오류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신중한 조치였다. 우의장은 계엄해제 이후에도 국회 집무실에 머물며 비상대기를 했다. 

또한 12월 14일에는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켜 혼란 속에서도 국민들에게 안도감을 준 것이 우원식 의장이었다.

 

우원식 의장 부모 묘소. 천안 병천면 공원묘원.

부친은 1987년에, 모친은 2020년에 별세했다. 부친은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으로 우원식은 9남매의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모친과 우원식은 60년 만에 장녀(큰 누나) 정혜씨를 만나기도 했다. 

우원식은 학창시절 전두환 퇴진운동으로 3년간 옥고를 치뤘다. 

1987년 대선에서 DJ를 지지하며 정계에 입문한다. 1992년 의원 보좌관을 거쳐 1995년에는 서울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6년, 21년 만에 연세대학을 졸업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원을구에 출마하여 권영진을 물리치고 국회에 입성한다. 18대 총선의 리턴 매치에서는 권영진에게 패했으나, 19대 총선에서는 다시 승리한다. 이에 권영진은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서 시장에 당선된다. 
 

맥로도. 전면에서 진입하는 맥로가 우의장 부모 묘소에서 15회절 명당을 맺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15회절 이상이면 국회의장이나 국무총리가 가능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한 이래 19, 20, 21, 22대 5선의원에 당선된 것은 부친의 풍수파워가 작동하였고, 2020년에 별세한 모친을 합장으로 모시니 풍수파워가 상승하여 국회의장도 되었다는 풍수적 판단이다.

■김민석 부친 묘소 

김민석은 정치적 풍운아이다. 20대 초반,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1980년대의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 및 삼민투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을 복역했다. 1992년 DJ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4대 총선에 출마한다. 상대는 경제기획원 장관 출신의 3선의원으로, 보수성이 강한 여의도에서 260표의 차이로 석패한다. 1996년 제 15대 총선에서는 31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등원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DJ의 후계자로 부상한다. 2000년 총선에서는 60%의 득표율로 당선되고 차기를 이끌어갈 세계의 지도자 100인에도 선정되었다.

그의 정치적 순항은 여기에서 잠시 멈춘다. 2002년 대선을 눈 앞에 두고 민주당을 탈당하여 정몽준을 지지하자 많은 사람이 실망했고, 김민석의 정치적 유랑이 시작되었다.

2020년 21대에는 정치적 고향인 영등포구에 출마하여 본선에서 50%의 득표율로 국회에 입성한다. 18년 만의 원내 복귀였다.

2024년 초, 총리와 당대표를 역임한 이낙연이 탈당하자 “사쿠라”라며 맹공을 퍼부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22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의 총괄 상황실장을 맡으며 민주당의 압승을 주도했다.

2024년 8월, 김민석은 윤석열을 포함한 소위 “충암파”가 계엄을 준비한다고 주장했다. 여당과 보수언론에서는 선동정치며 음모론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김민석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김민석 부친(2010년 11월 별세) 묘소. 양평수목원. 

노란 색 원, 불룩 돋아있는 부분이 부친을 모신 곳이다.

필자는 수목장의 위험성을 몇 가지 이유로 지적했지만, 명당에 모시면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맥로도. 맥로는 뒤에서 내려와 부친 묘소에 정확히 15회절 명당을 맺었다.
우원식 의장 부모님 묘소와 대등한 역량이다. 

김민석은 오랜 정치적 방랑을 끝내고 원내 복귀했다. 오해와 비난에도 12.3 비상계엄을 경고한 것은 정보력에 바탕한 소신이었다. 부친 묘소의 풍수파워도 많은 힘을 주었을 것이다.


■ 박선원 부친 묘소

제가 노무현 대통령님을 5년간 청와대에서 모셨습니다. 국민을 사랑하는 노무현의 마음이 단 1%라도 있었다면... 그 분이 어느 때 보다도 그립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그의 연설은 목이 메였다. 

박선원은 참여정부시절 통일외교안보 비서관을 역임했으며, 서훈과 남북정상회담의 물밑 교섭을 담당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상하이 총영사로 근무했으며 2018년에는 국정원장 특별보좌관을 역임하고 이후 국정원 기조실장과 제1차장을 역임한다. 해외와 대북 분야를 총괄하며 정보전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그는 2024년 3월부터 군의 인사와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고, 또한 7월부터는 김민석, 김병주와 더불어 군의 움직임과 수뇌부의 인사 등 계엄에 대한 의혹을 제기한다. 12월 3일에는 군부대의 대기태세 발령과 대통령의 심야담화를 사전에 간파하여 동료 의원들에게 전달하여 신속한 상황 대처를 가능케 하였다. 박선원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비상계엄의 실상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박선원 부친 묘소. 대전 현충원 장병묘역.
부친은 6.25 참전용사이며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86년 9월 별세. 

 

맥로도. 뒷산을 넘어온 맥로가 직진하다 박선원 부친 묘소에 12회절 명당을 맺었다. 공원묘원에서 12회절 명당은 흔한 것이 아니다. 

부친을 모신 이후에 박선원의 관로(官路)는 순탄했다. 특히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원내총무를 역임한 4선 의원을 꺽고 국회에 입성한 것은 부친 묘소의 풍수파워가 어떤지를 말해주고 있다. 

12.3사태 경고와 수습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또 다른 의원은 4성 장군 출신의 김병주이다. 그의 선영은 이미 게재(2024.04.15.일)하여 본회에서는 생략했다.

윤석열은 선대 조상과 부친을 흉지에 모셨다. 겸허하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거늘 무리수를 두어 자멸했다. 22대의 야권은 제제다사(濟濟多士)라 할 만하다. 게다가 선영의 풍수파워가 좋은 분들이 많다. 윤석열은 풍수전쟁에서도 이미 패한 셈이다.

※ 풍수는 무속과는 전혀 다르다. 무속은 접신(接神)을 전제로 하지만, 풍수는 끊임없는 연찬을 통해 자연(땅)의 현상을 판독하여 피흉추길(避凶追吉)하는 기법이다. 무속의 시비를 벗어나고자 선영을 파묘했다는 어떤 정치인의 말은 풍수와 무속을 구별 못하는 무지의 소이연(所以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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