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키세스’ 조선소 노동자 유최안 껴안다

한겨레21 2025. 1. 1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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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데자뷔]조선업 초호황, 노동 환경은 더 악화… 서울 중구 한화오션 앞 ‘무기한 농성 현장’에 눈부신 시민 연대
파란 비옷을 입은 청년과 시민들이 2025년 1월13일 서울 중구 청계천로 한화 본사 앞에서 열린 ‘한화오션 규탄 투쟁문화제\'에 함께해 ‘소수윗\'의 공연을 즐기고 있다.

겨울비가 내린 2025년 1월13일 밤, 파란 비옷을 둘러쓴 청년들이 서울 중구 청계천로 한화 본사 앞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들은 비티에스(BTS)의 ‘아미밤’ 등과 같은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까마득히 높은 한화빌딩을 배경으로 갖가지 깃발이 펄럭인다. ‘대한수족냉증협회’ ‘전국말벌시민협회’ ‘데모당’ ‘은혜는 두배로 원한은 열배로 갚는다’ ‘우리는 정상영업합니다’ ‘우울한 자들이 세상을 바꾼다’ ‘야생맘마먹음이보존협회’ 등 허를 찌르는 단체 이름들을 읽기도 숨 가쁘다. 그 복판에 소수자를 상징하는 무지갯빛 전국금속노조 깃발이 밤하늘을 오색으로 물들였다.

2022년 6월 유최안 당시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부회장이 거제 대우조선해양 도크 철창 안에서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금속노조 제공

한화오션 본사가 있는 이곳에선 전국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이하 조선하청지회)가 1월7일부터 무기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유최안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은 2022년 6월부터 31일 동안 경남 거제의 당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도크에서 건조 중인 원유운반선 화물창 바닥 철제구조물에 스스로를 가두고 이른바 ‘0.3평 철창 투쟁'을 벌였다. 그는 파업 종료 직전까지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고 적은 손팻말을 철창 사이로 들어 올린 채 농성했다.

경찰이 특공대까지 투입해 파업을 강경 진압한 뒤 대우조선해양은 김형수 지회장, 유최안·강인석 부지회장 등 노조 간부 5명에게 47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검찰은 김형수 지회장에게 징역 4년6개월, 유최안 부지회장에게 징역 3년 등의 중형을 구형했다. 형사재판은 2월19일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조선하청지회는 대우조선해양이 한화오션으로 넘어간 뒤 상용직은 30% 이하로 줄고 다단계하청 물량팀과 저임금 이주노동자 등 비숙련 노동자가 크게 늘어 중대재해가 빈번해졌다고 주장한다. 금속노조는 2024년 조선소에서 18명의 산재 사망자가 발생했고, 한화오션에서만 5명의 노동자가 폭발·추락·온열 질환 등의 중대재해로 숨졌다고 밝혔다. 조선업계가 수천억 흑자를 기록하며 초호황을 맞이했지만, 한화오션은 대우조선해양 인수 과정에서 약속한 성과급 등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유 전 부회장이 1월13일 투쟁문화제에서 호랑이 탈을 손에 든 채 이야기하고 있다.

2년 전 파업 강경 진압에는 ‘명태균 게이트’의 당사자인 명태균씨가 개입한 의혹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입수해 공개한 녹취록에서 명씨는 “조선소고 뭐고 내용을 잘 모르는데 대통령이 보고해달라고 해서 보고했다”며 “이영호 (옛 대우조선해양) 부사장인가한테 대우조선 보고서를 만들어달라고 했더니 부사장이 딱 해갖고 와서 강경 진압하라고 보고를 했다”고 말한다. 노조는 생존권을 건 파업에 명씨가 윤석열 대통령의 비선으로 불법개입한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도 요구하고 있다.

문화제 참석자가 한화를 규탄하는 글귀를 태블릿에 띄우고 있다.

노조는 이런 요구들을 내걸고 국회 앞에서 단식과 노숙농성을 벌이던 중 2024년 12월3일 계엄을 맞았다. 그리고 2025년 1월7일 한화오션 본사 앞으로 농성장을 옮겼다. 농성 첫날 저녁 한화오션 직원과 용역 경비 등이 텐트를 빼앗고 부수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 소식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알려지자 청년과 시민들이 달려왔다. 미처 오지 못한 이들은 커피·치킨·피자 등 먹거리와 핫팩·은박담요·보조배터리를 보냈다. 남태령에서 농민들과 함께 밤을 지새운 이들이, 한남동 관저 앞에서 폭설을 맞아 은박을 쓰고 버텨 ‘키세스’라 명명된 이들이 이곳에도 함께했다.

무지갯빛 금속노조 깃발 아래서 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이 춤추고 있다.

1월13일에는 찬비가 뿌렸지만, 청년들은 파란 망토를 두르고 시린 바닥에 앉았다. 이들 앞에 호랑이 탈을 쓴 이가 나섰다. ‘단결’이란 머리띠를 두른 탈을 벗자 낯익은 얼굴이 드러난다. 철창 사이로 보았던 처연한 눈빛, 유최안이다.

천문학적 금액의 손배소에 징역형 구형까지…, 힘겹고 지쳐 노조를 그만할까도 생각했다는 유최안이 힘찬 소리로 외친다. “다시 노조 하겠다”고, “시민들과 함께하겠다”고.

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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