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유물멍’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출판한 책 『유물멍: 가만히 바라볼수록 좋은 것들』(사진)은 유물을 통한 새로운 명상법을 제안한다. 한때는 누군가의 애장품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필생의 역작이었을 유물들. 비록 지금은 그 쓰임이 달라졌지만 아주 긴 시간을 여행한 만큼 각각의 유물은 수많은 인연과 사연을 안고 있다. 그 유려한 형태와 아름다운 빛깔에 빠져 있는 동안 이 오래된 속 깊은 친구로부터 무언의 위로를 받아보라고 제안한다.
단행본 담당자인 김미소 학예연구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대중과의 소통에 도전한 첫 번째 기획 단행본”이라며 “오래된 물건이 가득한 박물관에 젊은 이미지를 입힐 수 있도록 나름 파격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고 소개했다. 정제되고 보수적인 단어를 주로 쓰는 국립박물관이 젊은이들의 장난스러운 신조어 ‘멍때리기’를 책 제목에 쓴 것도, ‘최애 유물’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새로운 시도다. 정식 출간 전 알라딘 북펀드를 진행해 목표액(100만원)의 600%를 초과달성(331권 예약판매)한 것도 처음이다. 젊은 층에서 펀딩을 통한 신제품 홍보·마케팅 방법이 활발하고 익숙한 점을 활용한 것이다.
박물관에서 만든 책 치고는 편집도 새롭다. 책 오른쪽 면에 유물 사진을 크게 놓고, 왼쪽 면에는 200자 정도의 감상평만 앉혔다. 유물에 대한 설명은 명칭과 시대, 출토지 뿐. 익숙한 유물은 익숙한 대로, 낯선 유물은 낯선 대로 천천히 들여다보며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해인·이희승 디자이너는 중국 북송-금 시대 흑유 주전자 몸통의 대칭 선들을 보면서 “사람으로 치면 전국을 순회하며 달빛 아래 밤의 공연을 펼치는, 아무도 그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는 전설의 무용가 같은 모습”이라고 감상평을 적었다. 이성용 청년멘토는 조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백자 달항아리를 보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항아리 앞에 서면 자꾸만 까치발을 들고 싶어집니다. 안을 잘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거든요. 보름달 속에서 하염없이 토끼를 찾던 어린 시절처럼요”라고 적었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우리가 몰랐던 유물들의 발견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44만여 점의 소장품이 있다. 그중에는 달항아리, 반가사유상, 금동대향로와 같은 스타 유물들도 있지만 토우, 찬합, 진묘수처럼 친근하고 소박한 유물들도 있고 미처 몰랐던 흥미로운 사연의 유물도 있다.
예를 들어, 허형욱 학예연구관이 소개한 해남 대흥사 천조천불좌상 석불의 어깨 뒤에는 빨간 글씨로 일본(日本)이라고 쓰여 있다. 1817년(순조11) 겨울, 승려 장인들이 해남 대흥사에 모실 이 천불상을 만들었는데, 경주에서 불상을 싣고 해남에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일본까지 가게 된다. 다행히 배에 실려 있던 불상들은 이듬해 7월 대흥사로 무사히 돌아와 천불전에 봉안됐는데, 다산 정약용이 이 이야기를 듣고 후대에 남길 수 있도록 일본에 다녀 온 불상 뒷면에 ‘日本’자를 쓰자고 권했다는 것이다.
100가지 유물을 바라보는 100가지 ‘개취(개인의 취향)’ 중 당신의 손은 어느 페이지에서 멈추게 될까.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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