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유물멍’

서정민 2025. 1. 18.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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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제안으로 어깨에 ‘日本’자를 새긴 ‘해남 대흥사 천조천불좌상’.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MZ세대 신조어 중에는 ‘불멍’이 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 일명 ‘멍때리기’를 하는 것인데 비슷한 말로는 ‘산멍’ ‘물멍’ 등이 있다. 이 아이들 장난 같은 행위를 하는 이유는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간만큼은 현재의 고단함을 잊고 명상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출판한 책 『유물멍: 가만히 바라볼수록 좋은 것들』(사진)은 유물을 통한 새로운 명상법을 제안한다. 한때는 누군가의 애장품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필생의 역작이었을 유물들. 비록 지금은 그 쓰임이 달라졌지만 아주 긴 시간을 여행한 만큼 각각의 유물은 수많은 인연과 사연을 안고 있다. 그 유려한 형태와 아름다운 빛깔에 빠져 있는 동안 이 오래된 속 깊은 친구로부터 무언의 위로를 받아보라고 제안한다.

『유물멍』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발행한 뉴스레터 ‘아침행복이 똑똑’에 소개됐던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다. 팬데믹 기간 동안 박물관 관람이 힘들어졌을 때, 뉴스레터를 통해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들을 하루에 한 가지씩 소개함으로써 디지털 유물 관람 기회를 갖게 하자는 게 취지였다. 처음에는 박물관 학예연구사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두드리고 ‘박물관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가장 좋아하는 유물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 그러다 구독자들의 다양한 감상을 담아내기 위해 필자를 모았다. 응모자격은 단 한 가지, ‘박물관을 사랑할 것’. 이후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최애 유물’에 대한 특별한 경험과 시선을 글로 보내주었고, 그렇게 모인 글 중 100가지 유물과 100가지 사연을 골라 단행본으로 엮었다.

단행본 담당자인 김미소 학예연구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대중과의 소통에 도전한 첫 번째 기획 단행본”이라며 “오래된 물건이 가득한 박물관에 젊은 이미지를 입힐 수 있도록 나름 파격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고 소개했다. 정제되고 보수적인 단어를 주로 쓰는 국립박물관이 젊은이들의 장난스러운 신조어 ‘멍때리기’를 책 제목에 쓴 것도, ‘최애 유물’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새로운 시도다. 정식 출간 전 알라딘 북펀드를 진행해 목표액(100만원)의 600%를 초과달성(331권 예약판매)한 것도 처음이다. 젊은 층에서 펀딩을 통한 신제품 홍보·마케팅 방법이 활발하고 익숙한 점을 활용한 것이다.

박물관에서 만든 책 치고는 편집도 새롭다. 책 오른쪽 면에 유물 사진을 크게 놓고, 왼쪽 면에는 200자 정도의 감상평만 앉혔다. 유물에 대한 설명은 명칭과 시대, 출토지 뿐. 익숙한 유물은 익숙한 대로, 낯선 유물은 낯선 대로 천천히 들여다보며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백제 무령왕릉을 지키는 ‘진묘수’.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것을 보아도 만 명에게는 만 명의 느낌이 있듯, 책 속 사연들은 저마다 개성 있다. 금동반가사유상을 처음 본 서울 신서초등학교 원지성 어린이는 ‘반가사유상을 따라하는 나를 그린 그림’을 함께 보내왔다. 이유는 “반가사유상 혼자는 심심해 보여서”다.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금동반가사유상을 마주한 어떤 이는 입가에 머금은 천년의 미소에 빠져들 테고, 어떤 이는 부드럽고 유려한 옷 주름을 넋 놓고 바라볼 테지만 초등학교 아이는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된 이 조각상 앞에서 “혼자서 심심하겠다”며 자신이 친구가 돼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해인·이희승 디자이너는 중국 북송-금 시대 흑유 주전자 몸통의 대칭 선들을 보면서 “사람으로 치면 전국을 순회하며 달빛 아래 밤의 공연을 펼치는, 아무도 그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는 전설의 무용가 같은 모습”이라고 감상평을 적었다. 이성용 청년멘토는 조선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백자 달항아리를 보면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항아리 앞에 서면 자꾸만 까치발을 들고 싶어집니다. 안을 잘 들여다보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거든요. 보름달 속에서 하염없이 토끼를 찾던 어린 시절처럼요”라고 적었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우리가 몰랐던 유물들의 발견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44만여 점의 소장품이 있다. 그중에는 달항아리, 반가사유상, 금동대향로와 같은 스타 유물들도 있지만 토우, 찬합, 진묘수처럼 친근하고 소박한 유물들도 있고 미처 몰랐던 흥미로운 사연의 유물도 있다.

예를 들어, 허형욱 학예연구관이 소개한 해남 대흥사 천조천불좌상 석불의 어깨 뒤에는 빨간 글씨로 일본(日本)이라고 쓰여 있다. 1817년(순조11) 겨울, 승려 장인들이 해남 대흥사에 모실 이 천불상을 만들었는데, 경주에서 불상을 싣고 해남에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일본까지 가게 된다. 다행히 배에 실려 있던 불상들은 이듬해 7월 대흥사로 무사히 돌아와 천불전에 봉안됐는데, 다산 정약용이 이 이야기를 듣고 후대에 남길 수 있도록 일본에 다녀 온 불상 뒷면에 ‘日本’자를 쓰자고 권했다는 것이다.

100가지 유물을 바라보는 100가지 ‘개취(개인의 취향)’ 중 당신의 손은 어느 페이지에서 멈추게 될까.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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